권경환 개인전 - 마르기 전 규칙 / 류장복 개인전 - 투명하게 짙은 / 진시우 개인전 - 스타카토 블랙
Kwon Kyunghwan - The Rule before Drying / Ryu Jangbok - Transparent but Dense / Jin Shiu - Staccato Black
시각문화의 인문적 담론생산과 다양한전시방식을 시도해 온 일민미술관은 권경환의 《마르기 전 규칙》, 류장복의 《투명하게 짙은》, 진시우의 《스타카토 블랙》등 세 개의 개인전을 동시에 개최한다. 세 작가는 조형적 드로잉, 기록적 드로잉 또는 회화, 텍스트와 이미지를 기반으로 다양한 조형언어를 표현해 왔다. 이번 각각의 개인전에서는 회화, 조각, 영상, 설치가 어우러진 확장된 작업세계를 통해 개인의 경험을 드러내고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미술의 가치에 대해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실현해 보인다. 권경환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소비되는 이미지와 말을 소재로 미디어가 발생시키는 독특한 구조를 조명한다. 무언가가 견고해지는 전단계인 《마르기 전 규칙》 이라는 애매한 상황을 제시하는 작품은 관객의 틀에 박힌 생각들을 무력화 시키게 된다. 이미지의 시선을 다룬 과거 작품에서 나아가 사유의 매커니즘과 신체의 영역으로 확장된 새로운 작품들은 좀 더 깊이 있는 작가의 세계를 보여준다.
류장복 작가는 1957년 생으로 지난 30여 년간 철암, 성미산, 한남동 등 다양한 장소의 풍경을 진지한 시선으로 표현해 왔다. 작가는 최근 태블릿 PC의 드로잉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보다 자유롭게 매일의 풍경들을 기록하거나 과거의 작업들을 ‘다시’ 그리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지난 수십 년간 구축해 온 진정성 있는 회화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진시우의 개인전 《스타카토 블랙》은 작가가 2009년 뉴질랜드 RM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이후 5년만에 갖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간 작가가 옥인콜렉티브의 일원으로 보여주었던 도시의 사회정치 현실에 대한 예술의 침투와 개입과는 다른, 개인적인 예술적 실천방식을 보여줄 예정이다.
권경환 개인전 《마르기 전 규칙》
권경환, < 5초에서 8초> , 황동에 글씨 조각, 가변설치, 2014
권경환의 작업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노출 되는 시각적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소비되는 이미지와 말이 개인의 시선과 사고방식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주목한다. 동시대 수많은 정보가 대중매체를 통해 배포되는 과정을 거치며 일련의 사건과 사고는 실체를 알 수 없을 만큼 대상화된다. 이렇게 이미지가 소비의 매커니즘으로 구조화되면, 대중들은 죽음, 전쟁, 폭력과 같은 심각한 이슈들을 자극적인 유희거리로만 여겨질 뿐이다. 과거 권경환 작가는 미키마우스 폭탄이나 시체의 윤곽을 딴 자를 제작하여 미디어의 폭력성과 시선의 획일성을 특유의 유쾌한 시선으로 보여주었다. 과거 대중매체를 차용하고 자극적 이미지를 희화화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번 일민미술관에서 개최하는 《마르기 전 규칙》을 통해서 작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억압적으로 내재된 구조들을 설치와 조각으로 보여준다. 일부 사실만으로 진실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대중매체의 허구적 특성과 이념으로만 대중을 재단하는 강제성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 것이다. 결혼식 주례사에서 가져온 ‘사랑’, ‘존경’ 등 반복적으로 쓰이는 아름다운 단어의 의미를 < 5초에서 8초> 만에 각인시키는 재미있는 조각이 있는가 하면, 비닐봉지에 뼈대를 세우는 무의미한 행위를 지시하는 < 변화와 통일, 균형과 대비를 통해 팽팽하게 비닐봉지를 펼치시오> 통해 관객을 작품에 참여시킨다. 권경환 작가는 대중, 즉 관객에게 무의식적인 행동과 상상을 유도해 작가의 논리를 공유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시선을 유희할 수 있도록 한다. 여기서 전제하는 외부에서 인식된 사고방식은 대중의 시선을 넘어서 신체와 모든 사회구조를 집단지성의 틀과 억압성을 시사한다.
류장복 개인전 《투명하게 짙은》
류장복, < 2013년5월18일 12시32분 > , 90.9x72.7cm, oil on linen, 2014
《투명하게 짙은》전은 류장복 작가의 스물 한 번째 개인전이다. 작가는 오랜 기간 동안 철암, 한남동, 산황동 등을 “사생”하며 힘있고 방대한 양의 드로잉을 통하여 대중을 만나왔다.
특히 수년간의 ' 철암 그리기' 프로젝트는 폐광촌 타인의 공간에 작가의 추억을 투영시켜 진한 농묵이 스며든 따뜻한 마을로 재현하고 철암의 주민들과 대화, 워크샵을 진행하는 등의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면모를 보여주며 많은 이들에게 ' 철암' 을 기억시켜주었다.
작가는 어떤 멋진 풍경을 담기 위해서 각도나 장소를 미리 고민하지 않는다.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사방팔방을 둘러본 후 그 장소와 의미를 온전히 체화시켜 드로잉으로 옮긴다. 과거 철암프로젝트가 유년시절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것이었다면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창 그리기’ 프로젝트는 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작가의 방안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풍경과, 외부 매체를 통하여 접하는 타인의 사건, 언어가 함께 중첩되어 지층을 이루고 있다. ‘창 그리기’는 2013년과 2014년 초여름부터 늦여름, 특정 기간에 작업한 것으로 오랜 기간 축적된 작가의 필력에 매일 느끼는 새로운 감각이 색채로 더해졌다.
전시 제목 《투명하게 짙은》은 대상을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넘어 깊이 생각하고 마음으로 이해한 후에 물감을 쌓아가는 여정을 상징한다. 드로잉의 도구가 기존의 스케치북과 연필에서 태블릿 PC로 넘어왔다는 점, 도구의 변형만 있을 뿐 작가가 꾸준히 추구해온 “사생”과 대상과의 “대화”는 변함이 없다. 도구의 변화는 작가에게 “사생의 자유로움”을 더해주었다고 말한다. 《투명하게 짙은》이라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것을 다시 유화로 옮기면서 발생하는 기억의 지층들은 얇고 투명한 것에서 겹겹이 얹어지는 물감과 기억으로 함께 짙어진다. 회화의 진정성과 투명성을 지속적으로 고민해온 류장복은 회화를 소통의 수단으로 강조한다. 그림이라는 것이 소유의 대상이기 전에 소통의 궁극적인 형태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기존 프로젝트도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작가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풍경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자 한다. 소통의 수단으로써 그의 회화는 하나의 언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투명하게 짙은》전시에는 20여점의 캔버스가 ‘응시와 관조’, ‘감각과 기억’이라는 연결고리로 길다란 형태의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져있고 작가가 현장에서 “사생”을 통해 얻은 생동감 넘치는 드로잉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진시우 개인전 《스타카토 블랙》
진시우, < Andy and Albert > , Digital Print, 75x109.6cm, 2012
옥인콜렉티브에서 도시의 사회정치 현실에 대한 예술의 침투와 개입을 다루어 왔던 진시우는 이번 전시에서 보다 개인적인 차원의 예술적 실천을 펼친다. 작업은 주로 작가의 텍스트와 산발적인 메모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수시로 단어나 문장들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것들을 마주할 때 연상되는 이미지를 좇아가는 구현 방식을 보여주는데, 이 텍스트와 오브제는 일정 정도 지시 관계는 있지만 1:1로 정확히 대응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텍스트와 오브제 사이, 이야기와 물리적 형태의 작업 사이에는 어떤 가변적인 ‘틈’이 존재하는데, 이 ‘틈’은 작업을 제시하는 작가와 그 작업을 받아들이는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이해의 ‘틈’과도 같다. 진시우는 이 가변적 공간의 임의적인 시간을 포착해서 우연이기도 하지만 우연이 아닌 순간을 만들어 낸다. 작가는 이 순간을 눈을 깜빡이는 찰나마다 매번 다르게 경험하는 검정색을 뜻하는 ‘스타카토 블랙’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