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모란디
“현실보다 더 추상적인 것은 없다.”라고 말했던 모란디의 작품은 단순함과 고요함 속에서 예술과 존재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다. 모란디는 자신이 존경했던 세잔(Paul Cezanne)과 마찬가지로 가시적인 세계에 내재하는 무수한 이질성을 탐구하여 작품 속에 이를 독특한 질서로 재구성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그의 작은 작품 속에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사색과 예민한 직관의 총체가 담겨있다. 특히 모란디는 1940년대부터 크기가 다른 화면 위에 유사한 구성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선택한 일상적인 소재들은 형태, 구조, 색에서 미묘하고 아름다운 ‘변주’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볼로냐에 위치한 모란디 미술관(Museo Morandi) 소장품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모란디 작품 가운데 현상적인 세계에 대한 무수한 경험의 층과 인간지각의 애매함, 리얼리티의 모순과 상대성, 무한한 변수에 의해 달라지는 차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후기 작품들을 주로 소개한다.
○ 정물
모란디에게 있어 정물화는 회화의 구조와 정수를 밝히고, 존재의 근본과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최적의 장르였다. 정물을 소재로 삼았지만 물성, 질감 등 사물의 물리적 속성과 사실주의적인 테크닉의 능란한 구현, 바니타스(Vanitas, ‘인생무상’, ‘허무’를 뜻하는 라틴어)의 상징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정물화는 시각적 경험에 관한 것으로, 관람객으로 하여금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모란디는 벼룩시장에서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병을 골라 레이블을 떼고 페인트를 칠해 특유의 개성과 물성을 제거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사용하였다.
○ 조개껍질
조개껍질을 소재로 한 모란디의 작품은 그가 잠시 주요 소재인 일상의 사물들을 포기하고 기이한 형태, 즉 바로크적인 불규칙한 윤곽과 나선의 형태에 매료되었음을 보여준다. 생명 이전의 머나먼 시공간을 표현한 듯한 이들 작품은 전쟁 중 제작되었다.
○ 꽃
모란디의 꽃그림은 비범할 만큼 감각적인 색과 부드러운 비단의 감촉을 떠올리게 만드는 섬세한 촉감표현이 특히 아름답다. 흰색과 핑크, 녹색이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꽃이 가진 우아함과 순결함이 밀도 있게 표현되었고, 개개의 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유기적인 집합체로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 풍경
모란디 말년의 풍경화는 정물화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단순화된 형태의 실험, 빛의 극적인 사용과 아름다운 색의 하모니가 돋보인다. 모란디는 평범한 건물의 기하학적 형태, 빛과 그림자의 대비, 수풀의 리듬, 하늘과 들판 등의 소재를 반복하는 가운데, 절대적으로 회화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가 평생을 보낸 볼로냐 비아 폰다차(Via Pontazza) 스튜디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전쟁 중 공습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그리차나(Grizzana)의 소박한 풍경은 점차 한 폭의 추상화로 변한다.
모란디와의 대화
수세기에 걸친 오랜 전통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의 20세기 미술은 마찬가지로 오랜 전통과 격변의 근대를 경험한 한국의 20세기 미술처럼 변혁의 시대에 대응하며 역동적으로 전개되어 왔기에, 동서양의 같은 위도에 위치한 두 나라의 미술을 비교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특히 모란디 회화에서 느껴지는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 절제와 고요의 미학, 비어있는 충만함, 항상 같은 감정상의 긴장은 정신세계를 추구한 동양과 물질세계를 추구한 서양이라는 간극을 지우고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동일한 지평에 놓고 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모란디와의 대화’에서는 이번 모란디 전시의 중심이 된 정물에 초점을 두어, 모란디와 같은 시대를 산 한국작가들의 정물화를 비교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모란디에게 영감을 받은 동시대 작가들, 모란디와 유사한 태도로 사물에 접근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만날 수 있다. 도상봉(1902-77), 오지호(1905-82), 김환기(1913-74), 박수근(1914-65), 황규백(1932-), 김구림(1936-), 최인수(1946-), 설원기(1951-), 고영훈(1952-), 강미선(1961-), 신미경(1967-), 황혜선(1969-), 이윤진(1972-), 정보영(1973-) 등의 작품이 전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