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규는 2000년대 중반,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는 작업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1994년에 독일로 건너간 그는 현재까지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일상 오브제나 산업적 재료로 정치, 역사, 문화를 가로지르는 개념적인 작업을 펼쳐온 양혜규는 세계 주요 미술기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등에서 호평을 받으며 현대미술의 최전방에 선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양혜규: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는 국내에서 5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이다. 조지 오웰의 수필 「코끼리를 쏘다」와 로맹 가리의 소설 『하늘의 뿌리』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이 전시에서 코끼리를 은유적인 매개로 삼아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사유와 상상을 펼쳐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10여 년간의 대표작과 새로운 개념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전시장 초입에는 솔 르윗의 작품을 차용한 블라인드 신작과 입을 수 있는 방울 조각 < 소리 나는 의류> 가 설치된다. 그라운드 갤러리에는 문화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다룬 짚풀 공예 신작 < 중간 유형> 이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를 다룬 < VIP학생회> , < 서울 근성> , < 신용양호자들> 등이 전시된다. 블랙박스에는 대규모 블라인드 작품 < 성채> 와 방울 조각 < 소리 나는 인물> 이 공감각적인 환경을 구성한다.
이번 개인전은 그간 국내에서 접할 기회가 드물었던 양혜규의 주요 작품을 한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인 동시에 항상 새로운 작업 방향을 제시하며 왕성히 활동해온 작가의 다양한 면모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코끼리의 의미
작가는 코끼리라는 소재를 조지 오웰과 로맹 가리의 문학 작품에서 가져왔다. 이 두 소설의 코끼리는 현실에서는 연약하지만, 상상 속에서는 강인하며, 때로는 이 둘을 넘나들면서 은연중에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아마도 우리는 전시장에서 코끼리의 형상을 만나기보다는 문명적 상상력과 역사적 현실성 사이를 오가는 형상과 재료들의 은유를 만나게 될 것이다.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코끼리는 자연 생태계를 의미하고, 이로부터 괴리된 인간 윤리를 호소하는 매개적 존재이다. 코끼리를 생각한다는 것은 자연을, 그리고 야생을 우리 주변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포괄적 사고 체계를 지향함이다. 대자연에 대한 존중은 인간 윤리의 회복 조건이다.
기획전시장 입구 경사로 위에 설치된 < 솔 르윗 뒤집기 – 23배로 확장된,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 은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 솔 르윗의 <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 이란 작품을 23배 확장한 블라인드 설치 작품이다. 인물과 사건의 서사를 추상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던 기존의 블라인드 작업과 달리, 이번 신작은 솔 르윗 작품의 입방체 형태와 구성을 그대로 차용했다. 대신 원작의 위 아래를 뒤집고, 크기를 확장했으며, 선적인 구조를 블라인드의 면으로 대체했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사물이기도 한 블라인드는 형식적으로 기하학적 형태와 단일한 모듈이 반복되는 미니멀리즘의 특성을 지닌 소재이다. 따라서 솔 르윗의 구성 논리를 차용한 이 작품은 재료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미 잘 알려진 양혜규의 블라인드 작업의 큰 전환을 보여주는 동시에 새로운 계열의 블라인드 작업을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