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에는 서촌만의 느낌이 있다. 한옥, 기왓장, 인왕산 등 서촌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들이 있다. 아름다운 이 풍경을 한번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서촌을 특별하다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이 특별한 모습, 서촌의 풍광들이 주는 따뜻한 감성들. 이것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작가가 있다. 

김미경 작가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학시절, 인왕산 자락에 있었던 청운아파트에서 첫 자취생활을 시작하면서 서촌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많은 곳을 누볐고, 7년간은 뉴욕에서 살기도 했다. 2012년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뉴욕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의 서촌을 보게 됐다. 한옥이 눈에 ‘꽂힌’ 것이었다. ‘기절할 정도로’ 아름답던 풍광에 반해 그때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 그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매일 서촌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나 그리고 싶었던 것이 이유였다. 서강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1983년부터 국어교사, 여성문화운동가, <여성신문> 편집장, <한겨레신문>기자, 뉴욕한국문화원 리셉셔니스트,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 등으로 활동했다. 2014년 그의 나이 쉰 다섯엔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었다고 했다. 서촌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김미경 작가가 서촌을 그린 지 벌써 10년이 됐다. 그동안 그린 500여 점의 작품 중 90퍼센트 이상이 서촌이었다. 서촌 옥상과 골목에서 서촌의 풍광과 나무, 꽃을 그리며 살고 있는 그녀는 ‘서촌옥상화가’로 불린다. 하루 종일 뭘 그릴까 고민하며 이곳 저곳을 다니다 마음이 끌리는 곳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 털썩 앉아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또 그린다. 

김미경 작가

서촌은 그녀에게 어떤 곳일까, 어떤 매력으로 다가왔을까. 서촌과 시작된 그녀의 인연, 서촌과 함께 하는 삶이 궁금해졌다. 

Q. 어떻게 서촌을 그리게 됐나.

고향이 대구라 대학 시절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했어요. 2학년, 1980년부터 당시 인왕산 자락에 있었던 청운아파트에서 3년간 자취생활을 했죠. 그러니까 스무살에 서촌과의 인연이 시작된 거예요. 사실 대학 졸업 후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느라 서촌을 까맣게 잊고 지냈어요. 2005년부터 7년간은 뉴욕에서 살기도 했고요. 

2012년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서촌에 집을 얻어 살기 시작했어요. 뉴욕에서 살다 서촌에 다시 와보니 뉴욕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한옥들이 눈에 ‘팍팍팍’ 들어오는 거예요. 기억이 생생해요. 2012년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하기 시작한 첫날이요. 아름다운재단 옥상에 올라갔다가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그 풍광에 반해 버린 겁니다. 인왕산을 뒷배경으로 기와집들이 줄지어 펼쳐진 풍광이 숨이 멎을 정도로 좋았어요.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 풍경에 그렇게 매혹될 리는 없었겠죠? 

그때 갤럭시 노트인가를 들고 있었는데, 그걸로 인왕산과 기와집을 막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그날부터 서촌이 자꾸자꾸 그리고 싶어 못 살겠더라고요. 매일매일 서촌을 그리기 시작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뉴욕에 살면서 빌딩과 도로만 보아온 저에게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옥들이 펼쳐진 풍광은 엄청나게 새롭고 충격적이었던 것 같아요. 저의 정체성을 다시 찾은 느낌이었달까요? 어쨌든 그렇게 해서 서촌을 그리게 됐고, 2014년엔 다니던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서촌 그리는 화가로 살기 시작했죠.

서촌옥상도 1, 2014년, 펜, 42x29.4cm

Q. 서촌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올해로 꼭 10년 동안 서촌을 그렸어요. 물론 서촌 아니면 안 그린 건 아니고요. 제주에서 돌담을 그리기도 하고, 해남에서 동백꽃을 그리기도 했죠.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린 500여 점의 그림 중 90% 이상이 서촌을 그린 그림이에요. 서촌이 너무나 좋고, 미치도록 그리고 싶어 화가 생활을 뒤늦게 시작했으니까 자꾸 서촌을 그리는 거죠. 

10년을 그렸는데 아직 전혀 싫증이 나질 않네요. 개인적으로 성인이 되고 나서 제가 제일 오래 산 곳이기도 하고, 경복궁, 청와대, 정부종합청사 등이 있는 서울, 대한민국의 중심지이기도 하고요.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와 자연과 정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특별한 지역이어서 더 매혹적인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좋아서, 2017년, 펜, 72.7x116.6(50호)

Q. 서촌의 여러가지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담고 있는데, 어떤 소재, 어떤 장면들을 선택하나. 특별한 기준이 있나.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소재나 장면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그때그때 맘이 내키는 것, 좋은 것,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려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10년을 그리다 보니까 어떤 패턴이 보이는 것 같긴 해요. 초기에는 한옥이 주인공이었어요. 근대화 열풍 속에서 급속하게 사라졌던 한옥과 골목길을 거의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지역이라는 데 눈길이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10년쯤 살고 나니까 한옥이나 골목길 보다는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 북악산, 저 멀리 북한산에 자꾸 더 눈길이 가네요. 우리가 이렇게 산 속에, 자연 속에 둘러싸여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오늘도 걷는다 3, 2019년, 펜, 76x117cm(50호)

Q. 펜과 수채를 주로 활용하는데.

일본에서 제작 판매하는 Copic multiliner SP라는 펜으로 그립니다. 펜촉이 0.1mm, 0.05mm로 계속 닳기 때문에 계속 갈아 끼워 가면서 그려요. 그런데 최근 정말 한달도 안 된 시점부터 일본에서 이 갈아 끼우는 펜촉 생산을 중단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우연히 펜으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재미있기도 하고요, 제가 20여 년간 기자로 일해 왔잖아요. 물론 기사는 펜이 아니라 컴퓨터 자판으로 썼지만요. 펜으로 기사를 쓰다가 이어서 그림도 그린다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펜으로 기사 쓰다가 그림도 그리는 화가!!! 

수채는 꽃을 그릴 때만 쓰는데요, 아크릴이나 유화로도 그려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지만 아직은 좀 두렵네요.

전시 전경

Q. 그림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뉴욕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남아 있는 한옥 풍경이 너무 좋아 그리기 시작한 거니까요. 인왕산 아래 펼쳐지는 한옥이 그대로 있는 풍경이요. 그렇지! 우린 한국인이지! 우리의 문화가 있고 우리의 자존심이 있지! 하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긴 하네요.

 
지금은 자꾸 나무와 산이 그리고 싶어지는데요, 도시 속에서 살고 있지만 한 꺼풀만 벗어나면 우리는 자연의 한 부분이고, 곧 죽어 자연으로 돌아갈 존재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도시의 중심부에서 자연을 잊고 살지만 말이에요. 

Q. 앞으로의 계획은.

화가로 살겠다고 작심한 후 회사를 그만두고 그림만 그려 전시회를 해서 그림을 팔아먹고 산 지 올해로 꼭 10년째에요. 2년에 한 번 꼴로 그동안 여섯 번의 전시회를 했고, 비싸게 팔진 않았지만 어쨌든 3백 50점 정도의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살았어요. 그동안은 제가 그림을 잘 그려서 사람들이 이렇게 사주는구나 했는데, 10년쯤 지나고 생각해 보니 뒤늦게 화가가 되겠다고 열심히 그려 파는 모습이 귀엽고 기특해서 사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올 가을 일곱 번째 전시회를 준비 중인데, 이제 사줄 사람이 남아 있을까 싶어 걱정스럽기도 하고요(웃음).
 
그래도 묵묵히 그리고 또 그려서 전시회를 할 생각이에요. 스스로를 ‘생계형 화가’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데요. 올해로 64세인 저에게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제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이 그림을 사고, 그 돈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 싶어요. 그리고 싶은 것, 좋아하는 걸 계속 그리고, 전시회하고 그림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는 것, 그게 앞으로의 계획이에요. 더 거창한 계획은 없어요. 

제가 페이스북을 하는 건 페이스북을 제 그림가게라고 생각해서예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재미있는 그림이 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요. 

앞으로도 매일매일 뚜벅뚜벅 열심히 그리고요, 그림가게 페이스북도 열심히 해서 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또 그림도 팔고, 그렇게 살래요. 제 그림이 먼 훗날 박물관에 걸리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있지만, 그건 욕심일 뿐, 자꾸자꾸 그리고 싶은 이 마음이 계속되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입니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김미경 작가(www.rooftopartis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