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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특별 기고] '金敏基'를 기리며

2024-08-03

[김민기와 나] 

 

친구, 아침 이슬,그 날, 늙은 군인의 노래,
1986년 그 즈음, 노래방이 없던 시절
빈번하게 있었던 회식 술자리에서
노래 한 곡 뽑으라치면 마지못해 불렀던
나만의 애창곡 레퍼토리다.
다음 차례 선중이 ‘김밥’ 나온다.
일동 하하하…
김밥은 아침 이슬 도입부 ‘긴 밤’을 따
팀원 누군가가 내가 부르는 아침 이슬에
한해서 웃자고 붙인 별칭이다.
서툰 내 노래를 잘 차린 정식은 아니어도
김밥 정도의 간식으로는 인정해주는 거겠지..
완창 후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 술자리에 김민기가 함께 했더라면..
‘당신의 김밥도 독특한 맛이 있어
나는 내가 만든 김밥은 싫어서 못먹어
아침 이슬,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야
방금 부른 당신의 것이야. 용기가 좋았어’
소년처럼 방긋 웃으며 들릴듯 말듯
부끄러운듯이 박수를 보내주는 김민기.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 더 보태
김민기는 점점 나의 우상이 되어 갔다.

 

푸른 채소도 좋아라 
붉은 고기도 좋아라

 

땀 흘려 살아가는 사람들 따라
슬피 울고 웃는 형편들 따라

 

지금 보여지는 그대로를 
지금 느껴지는 그대로를

 

백색 밥에 올려 어둠으로 돌돌말아 
굳이 들어내지 않는 時代의 간편식

 

빛나는 금수저 은수저가 아니어도
봉황 문양이 새겨진 접시가 아니어도

 

평탄한 풀잎위 신문지 한장 깔아 놓으면
밥상이 되어 모두에게 平衡한 리얼리즘

 

나, 그대의 ‘김밥’을 노래했노라
이제 다시 노래하노라.

 

2024년 7월 21일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를
식혀주는 폭우가 한창 몰아치는 여름날 
김민기는 홀연히 떠났다.
‘나 이제 가노라’
아침 이슬처럼 그 김민기가 이제 갔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의 노래, 나의 우상이 갔다.
연이틀 김민기 노래만 들었다.

 

아니, 왜 내가 자꾸 버르장머리없이
김민기, 김민기하고 있는 거지?

이쯤해서 미리 밝혀야 할 듯 하다.
그 이름 석자에 이미 존칭어 그 이상의
의미가 들어가 있었다.
나에게 그냥 이름 석자, 김민기가 아니다.
‘김민기 = 그 무엇‘ 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현존하지 않을 것 같은 미지의 인물이고
가치였다.

 

[유복자, 김민기]

1951년 3월 31일,
익산 함열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조산원, 협업을 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6.25 전쟁통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민기가 어머니의 뱃 속에 있을 때 일이다.

 

 

 

 

친구 김영세 어머니에게 선물로 드렸다는 김민기의 생전 그림 

 

 

[김민기, 친구]

1968년, 경기고등학교 다닐 때
익사 사고로 친구를 잃었다.
사고 직후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속에서
참담한 마음으로 속절없이 창문 밖만
바라보며 달리는 기차 바퀴 소리따라
잃은 친구를 위한 노래만 생각했다.
….
얼마 후 그 노래, ‘친구’를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 싱어송라이터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 할 사람 누가 있겠오?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어린 나이에 삶을 관통한 언어의 조합을
나즈막하지만 높게 낮게 읖조리며
죽은 친구를 애도하는 18세 여린 소년..

 

 

 

 

[김민기, 아침 이슬]

마로니에공원이 있는 대학교를 다닐때 
정릉집에서 수유리로 이사했다.
반지하에 작은 작업실도 생겼다.
그림을 그리다 막히면 기타줄을 튕기고
노래가 막히면 다시 붓을 들고 했던,
그 곳 수유리 동산에는 묘지도 있었다한다.
어느 날 술 마시고 잠들었는데
눈부신 햇살에 깨어보니 묘지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그의 시련일지라
그의? 그의? …?
거기서 막혔다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구지?
예수? 석가? 성직자?
길고 긴 침묵이 답을 주었다.
그가 아니라 ‘나’ !
‘그‘가 ‘나’로 치환되는 순간
다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예수도 석가도 아닌 바로 내가
구도자, 구원자였던 것이다.
물론 김민기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달리 그는 지나치게 겸손했고
지나치게 자신을 낮췄다.
그는 저항시인, 투사, 전사, 민중가수, 구도자,
문화경영자 등 세상이 자기 입맛대로 붙여준 
온갖 수식어를 극구 부정한다.
단지 나, 김민기는 
“세상에 보이는 것을, 느껴지는 것을 쓰고 곡을 
붙이고 노래하며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다“..‘쟁이‘ 일뿐이다 라고 말한다.

 

1970년대 초
유신에 맞서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길거리로 나와 스크럼을 짜고 달리며
그 아침 이슬을 불렀다.
요란하게 터지는 최루탄 소리를 뚫고
울려 퍼지는 아침 이슬은
저들에게는 핵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이쪽에서는 이름 석자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투사 김민기가 되었고
저쪽에서는 불온한 노래를 만들어 
데모를 유도하는 불량한 학생이 되었다.

 

아침 이슬은 
그의 길고 긴 지난한 숙명적인 삶을 
예고할 틈도 주지않고 
곧 바로 ‘그’ 서막을 열어 놓았다.
지명수배자로 이곳 저곳 붙잡혀 가기를
여러번..
한번은 스펀지로 벽을 두른 어느 지하방에서
죽도록 얻어터지다가 아픈 감각을 잃어버린
순간에 공연히,
몽둥이질한 그 사람에게 죄인이 되게 해서 
미안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 때만해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할
그 긴 여정을 생각하지는 못한 것 같다.

 

[김민기, 야학]

1970년대 초 몇몇 동지와 뜻을 모아
청계천 상가에서 군용 텐트를 구입했다.
지금은 부촌이 된 그 옛날 난민촌 신정동 
버스종점터에 저녁 쯤이면 그 텐트를 치고 
가난과 싸우러 일터에 나갔다 돌아 온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르쳤다.
수업이 끝나면 텐트를 다시 고이 접고
막차를 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봉천동쪽 난곡에서도 그 일을 했다.
부평 피혁 공장에서 일할 때는
새벽에 일어나 야학이 아닌 조학을 했다.
밤늦게까지 일했으니 야학은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꿈은 얻는게 아니라 꿈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느끼는 삶을
살아라“라는 말도 해주었다.
노동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만들어 노동 현장에 배포하기도 했다.
결혼식을 생략하고 살아가는 노동자 부부를
한군데 모아 합동 결혼식을 올렸다.
김민기는 ’상록수‘를 축가로 만들어 들려주고
축의금을 대신했다.

 

[김민기, 농사]

1978년, ‘공장의 불빛’ 제작배포 사건 이후 
더 이상 공장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같다.
그 테이프제작에 도움을 주었던
송창식 가수가 수사기관에 붙잡혀가
고초를 겪어야 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또 먹고 살기위해 이번에는
고향 익산으로 내려가 농사를 시작했다.
기관원들이 찾아와 주인집 아저씨에게
동태를 보고하라고 윽박지른다는 것을 알았다.
주인집 아저씨에게 미안했다.
그의 성품으로 보아 가만히 있을리 없다.
곧 바로 김제로 옮겼으나
거기서도 오래 못버티고 농삿일을 접었다.
궁리끝에 민통선 안에 땅을 구입하여
또 땅을 갈고 그 일을 했다.
한 겨울에는 비닐하우스도 어려운 추위가
혹독한 곳이어서 겨울 농한기를 틈타 잠시
보령 탄광 막장에서 탄을 캐기도 하고
남쪽 낙도 김양식장에서는 일당 잡부로
쉴 틈없이 밥벌이를 계속 했다.
그 후 1983년 연천에서는 참깨 농사를 
했는데 집에 불이나 입고 있던 옷만 빼고 
모두 불에 타버렸다.
몇년의 행복했던 농부생활은 새캄한 재만 
남기며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농사 지으며 노래를 잊어버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날 내리치는 괭이 등에 흙이 ‘퍽’ 
하고 부스러지는 순간, 화성(和聲) 체계를 
잊고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너무 좋았다.
농사 짓는 그 시간은 꿈같고 행복했다.
24시간이 살아있어 정말 좋았다.
그렇게 당시 농촌 생활을 회상하고 
다시 그 땅으로 돌아고 싶다며 방긋 방긋
소년처럼 웃었다.

 

 

 

 

 

[김민기, 學田]

연천을 마지막으로 하고 서울에 왔을 때
1984년,
미국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돌아온 
친구가 어린이 뮤지컬을 같이 하자고
해서 거들어 줬을 뿐인데
어디선가 또 그들이 찾아와 일을 방해했다.
김민기가 관여했다는 이유 하나로
계획했던 그 뮤지컬은 접어야 했다.
이 때 스탭으로 참여한 여직원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후일 결혼을 하게 된다.

 

1987년 
온 세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던 어느 날
시청 앞에서 거행된 이한열 열사의 노제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거기서 수십만 시민이 부르는 아침 이슬을 
듣고 ‘소름끼쳤다’하며
김민기는 아침 이슬은 이제 더 이상 내 노래가
아니고 그 노래를 부르는 저 사람들의 것임을
깨달았다. 한다.

 

시간은 구름처럼 붕 떠 지나갔다.

 

1991년 대학로 동숭동, 
김민기는 지인의 건물 지하에 후배 연극단이 
들어올 수 있도록 소개를 주선했다.
그런데 보증금 5,000만원이 부족해 
포기해야 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고는
괜히 미안해졌다.
곧장 음반사에 찾아가 선불금 5,000만원을 
얘기하고 20년 만에 자신의 노래를 정식으로 
녹음하여 전집을 발매한다.
그리고 주선해주려 했던 그 소극장을 
생각할 틈도 없이 얼떨결에 떠맡게 된다.
‘학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준비되지 않은 시작때문일까 얼마되지 않아
빚더미에 쌓이게 된다. 
‘어차피 쌓인 빚더미인데 너희들 여기와서 
노래하고 싶으면 해’
그는 노래하는 후배들에게 공간을 내주었다.
이때 김광석은 공연 3,000회 이상의 대기록을
문짝을 뜯어가며 관객을 채워 세우지만 
여전히 빚은 해결되지 않아 
학전은 마침내 폐관 위기에 처했다.
그냥 물러설 나약한 그가 아니었다.
문닫을 거면 직접 작품을 만들어 걸어보자..

 

1994년 극단 ‘학전’을 창단했다.
이번에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준비를 좀 했다.
공부하다가 평소 김민기 자신이 생각해 오던
세계와 맞아 떨어진 독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 
‘Line 1’을 발견하게 된다.
곧 바로 그것을 수정 번안하여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무대에 올렸다.
처음에는 관객이 없었다.
입으로 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계속 찾아와 4,200회 이상 공연했다.
우리나라 연극 공연 이래 대기록인 것이다.

 

주변에서는 연극도 아니고 뮤지컬도 아니라고
비아냥 거렸다.
김민기 그는 연극도 아니고 뮤지컬도 아니고
그냥 내가 하는 일이다. 라고 말하며 이 번에도 
소년 표정을 지으며 허허 웃어 넘겼다.

 

취객, 회사원, 깡패, 군인, 청소부, 대학생,
노숙자, 조선족, 실향민, 창녀, 가출여고생, 이주노동자, 기둥서방, 구청단속반, 서울시장,
강남사모님…
수많은 등장인물을 배우 열두여명이 1인10역 
이상을 두시간 넘게 온몸을 번갈아 바꿔가며 
열창하고 몸짓하는 
시대의 애환을 담은 록뮤지컬이다.
그곳 학전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
무명 배우로 시작해 더 큰 무대로 진출하여
유명 배우가 된 사람도 수십명에 이른다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조승우, 장현성, 이정은,
안내상…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이소라의 프러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이 곳에서 공연되었고
학전을 거쳐 간 음악인으로는 김광석, 윤도현,
들국화, 유재하, 강산에, 동물원, 안치환, 정재일…

 

“여기는 조그마한 곳입니다. 
그래서 논바닥 농사는 할 수 없고
못자리 농사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는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에 가서 거두게 될 것입니다”
(1991년 ‘학전’ 개관 당시 김민기의 말)

 

’학전‘에서 사람 농사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고
그리고 실천했다.
그는 여러해 농삿일을 했는데 그 연장선에서
다른 일이지만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되면 얼른 나가. 뒤돌아 보지 말고"

 

‘학전‘의 못자리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볍씨만 골라 한 톨 한 톨 정성껏 뿌렸고
뿌리는 과정은 엄격하고 길었다.

 

설경구는 공연 포스터 붙이는 알바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노래를 진짜 못 부르고 춤도 
못 추는 몸치인 나에게 왜 뮤지컬를 같이
하자고 했는지 의아해 했다고 회고했다.
훗날 그가 성실해 보이고 그냥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랬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곳에서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추는
유명 뮤지컬 배우가 되어 넓은 무대로 
진출하여 대스타가 된다.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배우 여러명을 앉혀 놓고 하나 둘 셋 넷 
무릎치면서 유치원에서나 가르칠 법한 
박자감각 익히기에 열심인 김민기를 
한심하다는듯 쳐다보는 황정민의 멋쩍은 
얼굴 표정이 카메라에 잡혀 공개됐다.
어느 안터뷰 자리에서 자신의 그 표정을
보고 껄껄거리며 
‘아 그때 무릎을 치면서 박자 연습하는
내가 더 한심했어요 그때는 이해가 안됐어요’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신나게 이야기했다.
여러 달 그런 혹독한 준비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지하철 1호선’은 비로소 첫 공연이 시작된다.

 

그 시절 연극무대는 많은 극단에서 6개월에 
10만원도 대단하다는 소리를 할 정도로 
연기자를 노예 취급하여 착취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 연극판에서
'학전'은 배우들에게 공연 계약서를 내밀었다. 
난생 처음 보는 계약서 종이 한장,
이게 뭐야라며 모두들 놀랬다.
개런티 계약에 굶지 말라고 식권까지 주었다.
야밤에 여기 저기 쫓아다니며 품을 팔아야 
하는 고달픈 신세에서 벗어나 연극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학전은 만들어 놓았다.
감히 꿈에서도 생각 못할 엄청난 변화다.

 

'학전' 연출부는 회사 직원으로 분류되고
4대 보험까지 혜택을 받게 되어 전세 대출이
가능하다는 은행원의 연락을 받고 곧바로
찾아가 대출 받아 처음으로 전세 계약을 하고 
그날 아내와 행복해서 울었다는 배우도 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뒷것’,
김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모두가 모인 공연장에서
김민기는 월급 액수가 왜 얼마인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하며 
월급 봉투를 나눠 줄때 무척 행복해 했다.
물론 그도 똑같은 조건으로 월급을 지급 받았다.

 

2008년 어느 날 갑자기, 김민기는 
“돈되는 일만 하다가 돈 안되는 일은 못하게
될까봐”라고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잘 나가던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접고 수익성이 전혀 없느 어린이 뮤지컬을
시작했다
주변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오랫동안
공연해 오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그 옛날 야학을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어린이를 관객으로 하는 어린이 노래극을
준비해 온 듯하다.

 

“아이들의 그 삶을 아이들 본인한테 보여줌으로
해서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춰
내게끔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김민기식 어린이 리얼리즘,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그림자 소동 등 10여편의 어린이 뮤지컬을 
공연했다.

 

“입장료도 얼마 안되고 애들이 공연장에
혼자 올 수도 없으니 공연은 하면 할수록
적자나게 마련입니다 아이들도 공연보러
올 시간이 없어요 학원가야 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바보 같으니까,
미련하니까 어린이 뮤지컬 공연은 
계속한다고 했다.

 

"아이들도 온갖 고민과 소망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에요. 
우리 아이들에게 숨통을 터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을 어른들의 잣대로만 보지 말고 
그 자체로 보아주었으면 합니다."

 

어린이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공연 중에는 문틈 사이로 아이들이 손뼉치며
활짝 웃는 모습을 훔쳐보고 정말 행복해 했고
아이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때도 그는 행복했다.

 

2023년 12월 31일,
이미 막을 내린 극단 학전의 ‘지하철1호선’을
마지막으로 공연하였다.
만성적인 재정난과 건강 악화로 인해
이듬해 2024년 3월 15일, 
개관 33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많은 사람들이 울먹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학전 Blue’ 간판을 철거하며 
‘학전’은 막을 내렸다. 할만큼 한 것이다.

 

그는 
“좀 더 열심히, 더 많이 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학전을 기억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며 
‘행복했다’던 긴 여정을 정리했다.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2024년 7월 이선중 쓰다)

 

 

필자 이선중은 1958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를거쳐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제일기획에서 10년 정도 근무했다. 이후 1995년부터 2011년까지 16년간 광고기획 회사를 운영했고 지금은 틈나는대로 글을 쓰고 있다.

 

<편집자주> 
김민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글을 많은 매체에 올렸다. 김민기를 가장 좋아했고, 김민기를 가장 사랑했던, 김민기와 같은 고향이자 김민기의 서울미대 후배인 이선중 작가가 김민기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자신의 글을 디자인정글 편집부에 보내왔다. 

 

글_ 이선중

사진 출처_ 김민기를 추모하는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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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민기 #김민기와나 #김민기를그리며 #이선중 

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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