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09
심심하고 따분할 때 우리는 ‘아, 뭔가 재미난 일 없을까’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린 무언가를 시작한다. 몸을 움직여 공간을 정리하기도 하고, 책장을 뒤지기도 하며,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끄적 인다. 그러다 보면 재미난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새로운 취미를 발견하거나, 도통 떠오르지 않았던 일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거나, 전혀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충북 제천에 위치한 심심한책방은 바로 이런 곳이다. 문득 심심함을 느낄 때 새로운 영감을 통해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재미를 주는 장소다. ‘심심한책방’이라는 이름 역시 이렇게 지어졌다.
심심한책방
심심한책방은 신혜원 작가와 이은홍 작가가 꾸민 공간이다. 신혜원 작가는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세 엄마 이야기>, <할머니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어>, <평등은 개뿔>, <어진이의 농장일기> 등 많은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려온 그림작가다. 홍익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한 이은홍 작가는 <역사 신문>, <세계사 신문>, <머털이 한국사> 등의 작업에 참여했고, <역사야, 나오너라>, <술꾼>,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내 친구 똥퍼> 등을 펴냈으며, KBS <역사와 놀자>를 진행했다. 그는 ‘오늘의 우리 만화상’, ‘부천 만화상’ 등을 수상한 만화가다.
이들이 월악산 아랫마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그야말로 순수한 이유에서였다. 남들처럼 살기위해 서울에 빚을 얻어 집을 사고, 돈을 벌고 쓰며 살던 이들은 점차 그림을 대하는 ‘여유’에서 멀어졌고, 자본주의에 대해 문득 회의를 갖게 되었다. 때마침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아이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윤구병 선생의 계절학교를 다녔던 아이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똥을 치우고 살아도 좋으니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선언했고, 이에 이 두 부부는 흔히들 말하는 ‘쉽지 않은’ 결심을 했다.
심심한책방
지도를 펼친 부부는 대한민국의 중앙, 충청도를 손으로 짚었다. 이곳에 살면 어느 지역을 가든 2~3시간만에 이동할 수 있으니 놀러 다니기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을 버리기로 한 이들 부부는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충청도 곳곳을 샅샅이 뒤져 지금 심심한책방이 자리한 이곳에 터를 잡았다.
남편은 전주 출신, 아내는 서울 출신으로, 사실 남편 이은홍 작가는 한 번도 시골을 경험해보지 못한 서울여자 신혜원 작가를 만나면서 이제 시골에서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시골생활에 대한 꿈을 마음 속으로 품어왔던 아내와 시골에서의 삶을 갈망하는 아들의 뜻을 따라 충북 제천으로 향했다.
보통은 서울사람이 시골로 내려가면 동네 주민들의 미움을 사는 경우가 많다지만, 이들 부부는 시작부터 달랐다. 30마리가 넘는 개를 키우던 기존 주민을 대신해 우거진 숲을 정리하고 꽃과 나무를 심으며 가꾸기 시작한 부부의 모습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들 부부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이들 부부의 손이 닿으면서 거칠고 척박했던 터는 밝고 깨끗하며 아기자기한 모습을 입게 됐다.
심심한책방의 이은홍, 신혜원 작가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던 부부는 정착한지 16년만에 신혜원 작가의 ‘책방할머니’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2004년 이곳에 이사를 오자마자 9평짜리 작은 공간에 집에 있는 책을 모두 내놓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을 만든 이들은 동네 사람들이 책을 볼 수 있도록 한 이들 부부는 2020년 작업실을 개조해 심심한책방을 열었다. 10권이든, 20권이든 몇 권의 책이라도 팔면 그것이 바로 책방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했고 심심한책방을 열기로 했다. 이은홍 작가는 아내 신혜원 작가의 이러한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도왔다.
시골 마을 작은 책방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츰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늘었다. 코로나 시기에도 주말에는 물론 평일에도 꾸준히 손님들이 이곳을 찾았다. 심심한책방은 예비사회적 기업이 되기도 했다.
신혜원, 이은홍, 김이구의 책장
심심한책방엔 약 2500권 정도의 책이 있다. 모든 책이 판매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들이 주로 이곳을 찾는다. 이곳엔 개인의 책장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혜원의 책장과 은홍의 책장을 비롯해 ‘편집자들의 우상’인 소설가 김이구의 책장도 있다.
김민기의 책장
최근엔 공연연출가이자 가수로 활동했던 김민기의 책장도 만들었다. 김민기의 노랫말은 여러 그림책으로도 만들어졌다. 김민기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소장했던 책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방 한 칸을 채우고 ‘김민기의 방’을 만들었다. 이러한 책장을 들여다보며 방문객은 자신이 읽었던 책을 찾을 수도 있고, 그들이 읽었던 책을 읽으며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그들과의 ‘연결’을 경험하는 것이다.
얼굴+만남전_ 니 얼굴 사가라, 신혜원 작가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선 특별한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신혜원 작가가 마을주민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다. 할머니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기도, 청소년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신혜원 작가의 프로그램에 대해 이곳을 방문했던 심리치료사들은 이러한 프로그램이 미술 심리 치료의 과정과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기보다 그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신혜원 작가는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고 했다. 스스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즐기며 동화책이나 달력을 만들고 싶어하는 주민들은 신혜원 작가에게 새로운 영감을 전해주기도 한다고.
앞으로 이들은 또 하나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갤러리를 만드는 것이다. 신혜원 작가는 갤러리를 통해 자신의 작품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그림책 원화전을 열고자 한다. 아내가 앞장서면 열심히 따라가는 이은홍 작가는 새로운 아내의 목표가 조만간 또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심심한책방 이은홍, 신혜원 작가
이은홍 작가는 아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따라갈 뿐이라고 말하지만 아내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며 마을에 새로운 문화를 정착시키기도 했다. 동네 마을회관에 도서관을 만든 것이다. 그는 인문학부터 고전, 무협지, 만화책까지 다양한 책을 큐레이션했다. 처음엔 동네 주민들의 반응이 미지근했지만 도서관을 만든 후 마을 사람들은 달라졌다. 이은홍 작가는 이곳에 와서 가장 잘 한 일이 바로 마을에 도서관을 만든 일이라고 회고했다.
이들 부부는 나란히 새로운 책을 출간했다. 신혜원 작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하는 길을 이야기한 동화책 <거기에서 만나>를, 이은홍 작가는 시골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는 <달리기를 잘하는 법>(혜원 그림)을 썼다. 그가 기획한 4권의 동화책 중 첫번째 책이다. 신혜원 작가는 앞으로 더욱 작업에 몰두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 계획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시골에 살면서 실컷 놀았다는 이은홍 작가는 500페이지에 달하는 ‘벽돌집 만한’ 만화책을 계획하고 있다.
최근 이들 부부는 나란히 신간을 냈다.
신혜원 작가는 이곳에 수선화를 무척 많이 심어 놓았다고 했다. 4월 중순이 되면 수선화가 만발한다. 그때 책방에서 노래를 감상할 수 있는 작은음악회를 열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 부부. 신혜원 작가와 이은홍 작가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심심한책방에 모여 ‘궁리’를 하고 그로 인해 작은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공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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