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1
디자인정글이 업계 종사자 몇 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며 확인한 공통적인 말이 있다.
“공공입찰 PT에 나가면, 디자인을 설명하러 간 게 아니라 굴욕을 견디러 간 기분이 든다.”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는 매년 수백 건 이상 진행된다. 정부 부처, 지자체, 공공기관, 공기업 등이 브랜드 개발, 공공 디자인, 정책 홍보물 제작 등을 위해 경쟁입찰을 발주한다.
문제는 ‘심사’ 과정이다.
입찰에 참여한 디자인 회사들은 제안요청서(RFP) 하나를 분석하는 데만 수십 시간을 쓰고, 수많은 시안을 만들며, 발표용 영상과 모형까지 준비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고작 5~7명의 심사위원 손끝에 달려 있다. 더 큰 문제는, 그중 상당수가 디자인 전문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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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우리 딸이 봐도 촌스럽다네요”
한 중견 디자인 회사 대표의 회고다.
“심사위원이 발표 중에 그러더군요. ‘제가 디자인은 잘 모르는데요, 우리 딸이 봐도 이건 촌스럽다고 하네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순간이었죠.”
PT 발표장은 종종 상식이 무너진 공간이 된다. 심사 기준표는 형식적으로 존재하지만, 정량보다 정성 평가 비중이 더 높아 심사위원의 개인 취향, 감정, 심지어 그날의 기분이 결과를 좌우하기도 한다.
발표 중 휴대폰을 보거나, 딴청을 피우거나, 자리를 이탈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더 노골적인 경우도 있다.
“심사위원장이 지지하는 업체로 결정해달라”는 암묵적인 압력을 받았다거나, 불리한 평가를 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증언이 이어진다.
디자인이 아니라 ‘관계’와 ‘정치’로 평가되는 구조, 과연 이것이 공정 경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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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PT는 청문회인가, 취조인가?”
디자인 업계에서는 PT를 ‘청문회’에 빗대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일방적이고 압박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업체는 10~15분 안에 전체 기획 의도, 콘셉트, 전략, 디자인 시안, 예산 운영까지 설명해야 한다. 짧은 질의응답이 이어지지만, 질문은 종종 피상적이거나 몰이해적이다.
한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 왜 이렇게 많은 예산이 들어가죠? 그냥 인턴 써서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건 단순한 무례를 넘어 디자이너의 노동과 전문성을 부정하는 발언이다.
아직도 심사 테이블 위에는 ‘디자인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만’이라는 낡은 인식이 버티고 있다.
PT 발표장은 종종 상식이 무너진 공간이 된다. 심사 기준표는 형식적으로 존재하지만, 정량보다 정성 평가 비중이 더 높아 심사위원의 개인 취향, 감정, 심지어 그날의 기분이 결과를 좌우하기도 한다. (사진: AI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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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은 왜 평가받지 않는가
디자인 회사는 철저하게 심사받지만, 심사위원은 아무에게도 심사받지 않는다.
전문성 검증도, 평가 공정성 점검도 없다.
선정 결과에 대한 피드백은 거의 제공되지 않아, 탈락한 업체는 이유조차 모른 채 다음 PT를 준비해야 한다.
결국 같은 실수가 반복되고, 업계 전체의 질적 성장이 가로막힌다.
일부 기관은 특정 업체와의 유착 의혹을 받거나, 사전에 유리한 조건을 설정해 실질적으로 소수만 입찰할 수 있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경쟁’이 아니라 ‘짜맞추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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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가
디자인 업계가 침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하면, 밥줄이 끊기기 때문이다.
입찰 시장은 좁고, 심사위원 명단은 거의 비슷하게 반복된다. 한 번의 문제 제기는 열 번의 탈락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업계는 참고, 견디며, 다시 PT를 준비한다.
자존심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다.
하지만 이 침묵은 업계를 병들게 한다.
디자인이 ‘값을 후려치는 노동’으로 전락하면 창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
PT가 권력과 감정의 심사대로 변질될 때, 디자이너는 자기 이름을 걸고 창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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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받는 자’와 ‘평가하는 자’의 거리를 좁히려면
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디자인 회사가 PT를 받는 동안, 심사위원은 누구에게 평가를 받는가?”
공공 디자인이 세금으로 운영되는 프로젝트라면, 심사 구조 역시 공정성과 투명성을 갖춰야 한다.
전문성 없는 심사, 불투명한 점수, 피드백 없는 결과 통보는 모두 업계의 권리를 침해한다.
입찰 시스템의 신뢰는 심사 시스템의 정당성에서 출발한다.
디자인정글은 묻는다.
디자이너의 노동을 판단하는 그 권력, 과연 정당한가?
그리고, 누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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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_ 정석원 편집주간 (jsw0224@gmail.com) / 최유진 편집장 (yjchoi@jun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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