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7
서울시는 지난 2월 광화문광장에 ‘감사의 정원’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6·25 전쟁에서 한국을 도운 우방국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아 광화문광장 일부에 사계절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정원과 시민들이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계획이 광화문광장의 역사적 정체성과 도시적 위상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광화문광장은 단순한 휴식 공간이나 지역 공원이 아니다.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징 공간이자 이미 세계인이 주목하는 문화 광장이다.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리한 중심 공간, 수많은 집회와 축제, 시위와 기념행사가 펼쳐진 민주주의의 현장, 그리고 세계 관광객이 반드시 찾는 명소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서울의 첫인상이자 한국 정체성의 중심 무대인 이곳에 ‘감사의 정원’이라는 모호한 테마를 덧씌우는 것은 지나치게 소극적이며, 도시 브랜드 전략 차원에서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광화문은 이미 세계인의 광장이다
오늘날 광화문광장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필수 방문지다.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바닥에 새겨진 한글 창제 과정을 살펴보며, 촛불 광장에서 표현된 한국 민주주의의 힘을 목격하는 것은 세계인에게 특별한 경험이다. 뉴욕의 타임스퀘어, 파리의 콩코드광장,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이 각 나라의 상징이라면, 서울의 광화문광장은 ‘세종과 한글,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독창적 정체성으로 이미 세계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정원’은 이러한 위상을 좁은 정원 조경으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서울 도심 어디든 조성할 수 있는 ‘감사의 공간’을 굳이 광화문광장에 설치해야 할 이유는 없다. 반대로, 세종과 한글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은 광화문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이다.
광화문광장 일대를 ‘세종·한글 문화거점’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단순한 도시미관 사업이 아니다. 이는 한국이 세계 속에서 어떤 나라로 기억될지를 결정짓는 전략적 선택이다. (사진: 디자인정글)
‘세종·한글 광장’으로 재구성해야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감사의 정원’이 아니라, 광화문광장을 ‘세종·한글 광장’으로 격상시키는 전략적 재구성이다.
1. 광화문광장 자체의 정체성 강화
광화문광장을 공식적으로 ‘세종·한글 광장’으로 명명하고, 방문객 누구나 한글을 보고, 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공 디자인 장치를 확충해야 한다. 이를 통해 서울의 대표 광장은 곧 ‘세계의 한글 문화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2. 광화문 서측 마을 일대에 ‘세종탄신기념관’ 건립
세종대왕의 탄신과 업적을 체계적으로 기념하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과학·음악·천문학·법제 등 다방면에서 이룬 업적을 현대적으로 전시하고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은 한국형 르네상스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 특히 광화문 서측 마을인 통인동은 조선시대 준수방으로 세종대왕이 탄신한 곳이기에 역사적 당위성 또한 충분하다.
3. 송현공원 부지에 ‘이건희 미술관+한글미술관’ 조성
현재 논의 중인 ‘이건희 컬렉션 미술관’과 연계하여 ‘한글미술관’을 함께 건립한다면, 한글을 주제로 한 현대미술·타이포그래피·디자인·미디어아트를 전시할 수 있다. 이는 한글을 문자에서 문화예술의 언어로 확장시키는 세계적 거점이 될 것이다.
‘케데헌’ 열풍과 세계인의 관심
최근 한국 문화는 K-팝, 드라마, 영화, 문학, 웹툰 등 다방면에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이를 ‘케데헌(K-Pop Demon Hunters)’이라 부를 정도로, 세계인의 관심은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세계인들은 단순히 한국 콘텐츠를 소비하는 수준을 넘어, 그 뿌리인 한글에까지 눈을 돌리고 있다. 이미 전 세계 곳곳에서 한글학교가 늘어나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한글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점점 더 늘고 있다.
이 시점에 광화문 일대를 ‘세종·한글 문화거점’으로 탈바꿈시킨다면,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열광을 제도적·공간적으로 수용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관광 산업의 파급력은 물론, 국가 이미지 제고라는 측면에서도 막대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광화문광장은 단순한 휴식 공간이나 지역 공원이 아니다.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징 공간이자 이미 세계인이 주목하는 문화 광장이다. (사진출처: 구글)
‘감사의 정원’은 어디서든 가능하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감사의 정원’의 의미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광화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감사라는 보편적 정서는 시민공원, 지역공동체, 학교, 병원 등 다양한 공간에서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세종과 한글은 오직 광화문만이 품을 수 있는 고유한 상징 자산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다.
미래 세대를 위한 전략적 결단
광화문광장 일대를 ‘세종·한글 문화거점’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단순한 도시미관 사업이 아니다. 이는 한국이 세계 속에서 어떤 나라로 기억될지를 결정짓는 전략적 선택이다.
‘감사의 정원’은 아름다운 이름일 수 있지만, 세계적 문화도시 서울의 위상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광화문은 세종과 한글의 땅이며, 한국인의 자부심과 세계인의 호기심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이제 서울시는 ‘감사의 정원’이 아니라, 세종과 한글을 중심으로 한 미래 비전을 과감히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문화적 힘을 세계에 알리고,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 될 것이다.
글_ 정석원 편집주간(jsw0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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