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9
과거 수많은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코르셋에 몸을 맡겼다. 침대 기둥을 잡고 한껏 숨을 들이마시면 누군가 뒤에서 있는 힘껏 끈을 당겨 코르셋을 조이고 또 조였다. 조금이라도 가늘고 잘록한 허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코르셋’은 누군가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세계적인 패션 거장 장 폴 고티에의 현재는 바로 이 코르셋으로부터 비롯됐다.
에디터 | 최유진(yjchoi@jungle.co.kr)
자료제공 | 서울디자인재단, 현대카드 홍보팀
현대카드의 21번째 컬처프로젝트 ‘장 폴 고티에 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장 폴 고티에는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개구지고 자유스런 모습이었다.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준 것에 대해 그는 ‘외할머니와의 시간’들을 나열했다.
어린 시절, 미용실을 운영했던 외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낸 그는 할머니의 손을 통해 아름답게 변화되는 손님들의 모습이 참 좋았다. 남자아이에게 인형을 사주지 않았던 부모님과 달리 외할머니는 그의 취향을 존중했다. 그는 자신이 아끼던 ‘나나’라고 하는 테디베어에게 브래지어를 입혀주고 웨딩드레스를 입혀주기도 했다.
할머니와 함께 TV를 즐겨보기도 했는데 TV에서 보았던 〈빨발라(Falbala)〉라는 영화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카바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수업시간에 그림을 그리다 선생님께 들킨 어린 장 폴 고티에는 벌로 하루 동안 등에 그림을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그때 많은 아이들이 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했고 축구를 잘 하지 못해 ‘왕따’를 당했던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주목을 받게 됐다. 그의 재능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할머니가 외출했을 때 열어본 할머니의 옷장에선 처음으로 코르셋과 깃털 등을 보았다. 그것들은 그에게 영감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여성을 ‘구속’하던 코르셋을 동경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성은 약하다’는 고정관념과 여성패션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탈피, 강인한 여성성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원뿔형 브라(Con Bra)’가 그것으로 1990년 ‘블론드 앰비션 월드 투어(Blond Ambition World Tour)’ 콘서트에서 마돈나가 입었던 원뿔형 가슴 컵이 달린 코르셋은 세계적인 이슈를 불러일으키며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신체를 대표하는, 갇혀있던 것들을 재해석한 것이었다.
샤넬이 가방에 끈을 달아 여성의 손을 자유롭게 했고 이브 생 로랑이 여성에게 바지를 선사해 치마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다면, 장 폴 고티에는 남성에게 치마를 입히고 남녀의 성별 구분이 없는 ‘앤드로지너스 룩(Androgynous Look)’을 선보여 정형화된 성(性)의 개념을 재해석했다.
고티에는 일반인 혹은 뚱뚱하거나 나이든 모델을 런웨이에 세우기도 했다. 노란머리가 전형적인 미의 상징이던 시절, 빨간 머리와 검은 피부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전문적인 모델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그는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미(美)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온 그는 지금껏 없었던 것을 있게 했고 오랜 시간 옳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으며 과감한 시도로 패션계에 혁신을 일으켰다.
그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려고 캔을 따며 ‘아프리카의 팔찌’ 같다고 생각해 캔에 도금을 하고 멋진 팔찌로 완성시키기도 했다. 그는 “원래의 용도가 아닌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고 새로운 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디자인 한 〈제5원소〉의 의상에서도 ‘파격’은 드러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세계적인 영화감독, 팝스타와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정식 디자인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재능으로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에게 발탁돼 패션계에 입문한 고티에는 기성복 디자인의 선구자 ’장 파투(Jean Patou)‘ 하우스를 거쳐 1976년 자신의 첫 오트쿠뒤르 컬렉션을 시작했고 1980년대부터 규범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다. 여러 유명인사들이 그의 옷을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창조적인 패션세계를 풀어내는 작업에만 몰두하게 됐다. 그는 “오트쿠뒤르는 자신만의 패션을 풀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영역”이라고 했다.
DDP 디자인전시관에서 오는 6월 30일까지 열리는 이번전시는 장 폴 고티에의 40년간의 패션세계를 조망하며 그의 패션에 대한 영감, 파격적인 시도, 새로운 미를 바라보는 관점 등 그가 지닌 패션에 대한 철학과 예술성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캐나다 몬트리올 미술관(MMF)과 프랑스 장 폴 고티에 하우스가 공동으로 기획, 2011년 캐나다 몬트리올 미술관에서 시작해 샌프란시스코, 마드리드, 스톡홀름, 뉴욕, 런던, 파리 등 8개국 11개 미술관에서 2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전시로 이번 국내 전시는 월드투어의 마지막 전시이자 아시아 유일의 전시다.
전시에서는 150여 점 이상의 오트쿠튀르 의상과 1976년부터 2016년 사이에 디자인된 기성복 의상들을 포함해 수많은 오브제, 문서자료 등 총 220여 점의 작품들이 공개된다. 우리 전통의상 한복을 재해석한 작품과 지드레곤, 씨엘의 모습을 형상화 한 작품도 있다. 작품들만 옮겨와 나열한 방식이 아닌 이번 전시만을 위한 디자인 작업이 이루어진 것도 특징이다. 다양한 조명과 영상, 무대장치 등을 통해 꾸며진 전시장뿐 아니라 의상을 입혀놓은 마네킹도 특별하다. 살아있는 듯 생생한 표정의 마네킹은 3D 프로젝션 기법을 통해 제작된 것으로 장 폴 고티에를 포함해 모델, 영화감독 등 유명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고 있다.
전시는 총 7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섹션 ‘살롱(Salon)’에서는 장 폴 고티에의 영감의 원천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코르셋 작품들과 함께 그의 소중했던 ‘브라입은 테디베어 ‘나나’’, 외할머니와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TV, 사진 등의 오브제도 있다. 한복을 재해석, 원뿔 브라와 조합한 작품도 설치돼 있다.
‘오디세이(Odyssey)’에서는 그의 작품세계에 담긴 주요스토리가 펼쳐진다. 그의 작품 속 핵심 인물들은〈오디세이〉로부터 비롯됐다.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인물들과 함께 줄무늬 선원복을 입은 고티에도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그가 얻은 영감을 볼 수 있는 섹션이다.
그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근원인 피부와 신체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스킨 딥(Skin Deep)’에서는 그의 피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로맨틱하고 패티시즘적인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한 그에게 재료는 ‘제2의 피부’다. 장르의 다양성을 도입, 성적 표현과 트렌스젠더적인 면까지 아우른 폭넓은 스타일을 볼 수 있다.
‘펑크 캉캉(Punk Cancan)’은 펑크의 반유물론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전통에서 벗어난 패션을 탐구한 그의 작품세계를 선보인다. 런던 거리의 에너지에서 영감을 받고 새로운 소재를 발견한 고티에는 펑크 정신으로 재활용을 하고 특이한 물건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극빈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반항적이며 거친 펑크의 성격에 매료된 그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도시 정글(Urban Jungle)’에서 도시는 그에게 스타일을 사냥하기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순서를 바꾸고 배열과 조합을 새롭게 하는 그는 자신만의 디자인으로 여러 문화 사이의 소통을 조율하고자 했다. 그는 섞고, 휘젓는 과정을 통해 풍미가 더해지고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점에서 사회를 ‘칵테일’이라고 생각했다. 스타일뿐 아니라 여러 문화, 인종의 조합을 중시했던 그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공상과학, 뉴웨이브, 하우스 뮤직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그의 작품세계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에서 만날 수 있다. 그는 비닐, 라이크라, 네오프렌과 같은 첨단 기술로 만든 소재들을 활용하고 네오프렌이 코팅된 가죽과 입체 원단, 공기를 넣어 부풀릴 수 있는 옷감 등 혁신적인 혼합물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마돈나, 너바나, 레이디 가가, 비욘세 등의 팝스타와 록 가수들과의 작업에서도 그의 미래지향적인 작품세계가 드러난다.
마지막 섹션인 ‘결혼(Les Mariees)’도 ‘역시 고티에’를 외치게 한다. 순수하고 순종적인 아름다운 신부의 이미지 대신 그가 제시하는 것은 강하고 개성 있는 신부의 모습이다. 여러 전통 문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는 헝가리 경기병복의 요소를 치마 장식에 사용하거나 족장 혹은 전사의 깃털 머리 장식을 활용하는 등 남성적인 요소를 드레스에 적용시켰다. 아프리카 가면과 같은 형상의 드레스는 방패에 가깝다. ‘전 연령대의 사람이 원하는 만큼 자주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결혼’을 위해 그가 제시한 다양한 패션을 볼 수 있다.
정식 디자인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가 주류의 흐름과 규율 대신 선택한 것은 ‘파격’이었다. 자신에게 영감을 준 것들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열정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다른 삶을 모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며, 과거를 중오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껴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패션 거장이 남긴 이 말은 비단 패션이나 디자인, 예술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기억해야 할,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위한 메시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