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10
‘내리면 탑시다’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잉투기’ 영화 포스터를 제작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파고다어학원’의 그래픽 작업도 진행했다. 5년차 일러스트레이터 김나훔의 이야기이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당최 모르겠다는 거다. 너무도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고민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납득이 갔다. 그가 원하는 삶은 ‘그림’ 그 자체라기보다 그림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이 누구인지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는 과연 '나'를 찾았을까?
에디터 | 추은희(ehchu@jungle.co.kr)
Side 1. 신 나는 일을 하는 사람
그림을 전공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전공은 제과, 제빵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멋진 뮤지션이 되고 싶었다. 물론 얼마 되지 않아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졸업 후엔 레스토랑에 취업했다. 하지만 보람이나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 시작한 게. 나는 그림을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퇴근 후 재미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조금 있다가는 아예 이쪽으로 전향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림만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림과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것이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인쇄 관련 일이다.
개인 작업을 꾸준히 SNS에 올리고 있다. 그 덕에 많이 알려진 것이 사실이고. SNS를 가장 잘 활용하는 아티스트가 아닐까 싶다
SNS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를 알릴 기회도, 응원해주는 인맥도 없었다. 작품을 홍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SNS에 올리는 것뿐이었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고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를 때마다 흥분됐고, ‘재밌다’, ‘기발하다’라는 댓글에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나를 알릴 수 있었던 작품은 역시 ‘내리면 탑시다’라는 포스터였다. 당시 지하철에서 느낀 감정을 그려 올렸는데 거기에 공감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퍼 나르면서 유명해졌다. 그 과정에서 영화 ‘잉투기’ 대표님의 의뢰를 받아 포스터 작업도 하게 됐다.
‘잉투기’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클라이언트로부터 작업 의뢰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무엇인가?
‘잉투기’ 포스터는 평생 잊지 못할 작업이다. 클라이언트로부터 의뢰 받은 첫 작업이기도 하지만, 작업 자체가 즐거웠다. 돌이켜봐도 전무후무한 영화 포스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일러스트로 표현한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고 실험적이지 않은가. 이후 작업한 파고다어학원 그래픽 작업도 기억에 남는다. 어학원 건물의 외벽, 회전문, 지하철 등 다양한 장소에 부착되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여담이지만, 내 작품 보려고 지하철을 몇 대나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희한한 건 카메라까지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을 때는 안 나타나다가 술 먹고 비틀대며 집에 갈 때는 그렇게 잘 보이더라.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보통의 작가들과는 다른 본인만의 작업 방식이 있을 것 같다. 간단히 소개해달라
고등학교 때 컴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 자격증을 공부하면서 익혔던 작업 툴을 주로 쓰는데,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나만의 방식인데 나쁘게 말하면 돌연변이? 우선 일러스트 펜툴을 이용해 스케치를 한다. 그리고 포토샵으로 그걸 끌어온 다음에 디테일을 살리고 빈티지한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오래된 간판이 주는 느낌, 즉 미숙함이나 어설픈 감정을 좋아한다. 사랑스럽달까? 그래서 그림 그릴 때도 일부러 비뚤게 그린다든지 잘 그려놓고 막판에 낡은 종이를 합성하는 등의 작업을 많이 했다. 최근엔 수작업에 대한 고민도 종종 한다. 물론 디지털 작업만으로도 원하는 느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수작업을 이용하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다.
Side 2.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는 김나훔 작가만의 독특한 그림 스타일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스타일을 유지할 건가?
의뢰가 들어오는 일들은 재미있고 소위 ‘병맛’이라고 하는 스타일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스타일의 작업을 많이 하게 됐다. 하지만 그것만이 내 그림의 전부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편안하고 감성적인 그림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요즘 고민이 많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수요가 있는 부분을 더 발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스타일도 계속 해볼까 하는. 아직 고민 중이지만 일단은 한 가지 스타일을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해보자는 것이 결론이다. 병맛 스타일이 짧은 기간에 너무 빨리 소모되어 버린 느낌도 있고 해서 꾸준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또 변화하려고 한다. 물론 기존 스타일도 계속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그림에는 여러모로 작가의 성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나도 잘 모르겠다. 진지했다가 웃겼다가 괴팍했다가 소녀감성이었다가. 스스로 참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외친다. 그런 감정의 양면이 심하게 느껴질 때는 상당히 괴롭다. 그냥 인정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런 모습도 나고 저런 모습도 나다. 일관되지 못한 모습들을 그냥 나 자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최근엔 내가 너무 왔다갔다 하면 독자들이 헷갈려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된다. 웃긴 그림을 기대했는데 갑자기 진지한 게 나와버리면 당황스러울 테니까.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대중을 배려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조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을 배려하는 순간 나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럼 김나훔의 그림이 아닌 게 되지 않나
맞다. 그걸 의식하는 순간 끝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사실 ‘내리면 탑시다’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는데 대중들이 공감해준 것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이미 맛을 한번 봐버렸다. 비행기를 한번 쫙 태우니까 나도 모르게 의식이 된다. 아이러니한 건 의식하고 그리니까 오히려 대중이 외면하더라. 며칠 전에 내 작품에 달린 댓글을 본 적이 있다. ‘너무 쥐어짜려고 애쓰시는 거 아닌가요?’라는 내용이었는데 뜨끔했다. 아, 느껴졌구나. 그래서 ‘그렇게 보이셨군요. 조언 감사합니다’라는 답글을 달았다. 그러고 나서 생각을 많이 했다. 스스로한테 질문하며 다시 한 번 점검도 하고. 참 어렵다.
그림을 보다 보면 일상의 평범한 것을 캐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 편인가?
편안함으로 눈을 돌린다. 원래 사진에 관심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보고 있으면 눈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진을 특히 좋아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보게 되는 것. 보다 보면 조급함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영감이 떠오를 때가 있다. 또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한다. 그림 관련된 책은 아니고 스스로 치유되고 위로받는 책을 주로 고른다. 최근에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너무 재미있게 봤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하고 싶은 걸 해’인데, 지금의 내 상황과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거다. 스스로 계속 ‘아 맞아, 브레이크 없이 살아야지’라고 되뇌며 작업하곤 한다.
Side 3. 한 발짝 더 전진하려는 사람
최근에 ‘뭐’라는 에세이를 발간했다. 책은 어떻게 내게 된 것인가?
언젠가부터 내 작품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출판사에서 제의를 받아 책을 출간하게 됐다. 출판사의 의도에 따라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를 그대로 담을 수 있게 해줘서 좋았다. 불안정한 그때의 나, 고민 많은 지금의 나를 책에 두고 간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작업했다. ‘뭐’라는 제목도 내가 정했다. 평소에 내가 ‘뭐’라는 말을 많이 쓰더라. 웃겨도 뭐, 우울해도 뭐, 짜증나도 뭐. 명확하지 않은 추상적인 단어지만 그게 바로 정리되지 않은 나와 내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그러고 나서 엉뚱하고 이상한 나, 사실은 작고 나약한 나, 조금은 센척하고 싶은 나, 이렇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로 나눠 책을 구성했다.
일러스트북이 아닌 에세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러고 보면 글을 쓰는 것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맞다. 나는 내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이다. 그것이 그림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음악이든, 글이든 간에 말이다. 내 작품을 보면 그림만큼 글도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과 함께 한두 문장의 카피로 작품이 완성되는데, 간혹 그림을 설명해주는 글이 있는 것이 과연 좋은 그림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나는 내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면 그게 뭐든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내 작품에는 글이 들어갈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 이야기를 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만큼 고민도 많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달라.
그동안은 다른 사람이 일을 의뢰해주기만을 기다렸다면, 앞으로는 주체적으로 내가 먼저 일을 제안해보고 싶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포트폴리오가 쌓였고 스스로 자신감도 조금 생겼으니까. 재미있는 일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모으고 팀으로 함께 일을 해보고 싶다. 시각적인 활동이 포스터나 간판 등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지역이나 장소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발전되었으면 좋겠다. 아 물론 인쇄소 일은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사장님이 내가 그림 그릴 수 있도록 시간적으로도 배려를 많이 해주고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신다. 개인 작업, 클라이언트 작업, 인쇄소 일,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잘 분배해서 병행해나갈 것인지가 현재 나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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