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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디자인, 범죄예방을 선언하다

2012-10-26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예쁘게 만들자’라는 ‘제조’의 의미만으로는 더 이상 디자인을 대변하지 못한다. 유형의 모습뿐만 아니라 무형의 시스템으로도 이제 디자인은 우리 사회 속에서 보다 많은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확대되고 있는 디자인의 영역, 그 속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서비스디자인’이라는 분야가 크게 주목 받고 있다. 서비스디자인은 유,무형의 창조적 디자인 프로세스로 소비자에게 보다 나은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디자인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이들에게는 아직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는 말이지만, 이미 서비스디자인은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공공, 민간 분야에서 꽤나 많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교육, 의료, 치안, 교통 등 공공분야에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개선하는 공공서비스디자인은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속가능 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얼마 전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공공서비스디자인 한 부분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지난 10월 17일 열렸던 ‘서울 국제 범죄예방 디자인 세미나’로 범죄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는 디자인적 방식을 이야기했다. 범죄예방과 디자인, 그 둘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발표된 ‘범죄예방 디자인 프로젝트’를 들여다본다면, 디자인이 사회문제 해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료제공 | 서울시, 서울디자인재단

‘범죄예방 디자인 프로젝트’는 서울시가 범죄나 안전문제에 취약한 두 곳을 시범 사업지로 선정, 범죄예방디자인, 셉티드(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를 실제 적용한 사업이다. 셉티드란 ‘범죄예방을 위한 도시환경 설계’란 뜻으로 범죄발생 기회를 사전에 차단하고 예방하는 디자인을 말한다. 이번에 시범 사업지로 선정된 두 곳은 ‘마포구 염리동’과 ‘강서구 가양동 공진중학교’로 골목길 범죄와 학교폭력이라는 최근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주민들과 함께하는 골목길 범죄예방

‘마포구 염리동’. 이곳은 서민보호치안강화구역으로 지정되어있는 지역으로 좁은 골목길엔 CCTV 하나 없는데다, 조명마저 어두워 주민이 범죄에 쉽게 노출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이곳에 오래 거주한 주민들의 비율은 줄고, 외부세입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주민들 간의 갈등도 상존하게 되었다. 더욱이 거주자 분포에서 여성의 비율이 높은데, 밤이면 상점도 거의 닫아 급박한 상황이 닥쳐도 마땅히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동네가 전반적으로 너무 어두워서 무서워요’, ‘저희 동네 CCTV와 비상벨은 어디에 있나요’, ‘저는 일이 끝나면 새벽 두시에요. 오히려 밤에는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게 더 무서워요’ 등 공청회를 통해 나온 주민들의 목소리 역시 범죄 노출에 대한 불안감을 담고 있었고, 이에 서울시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소금을 테마로 한 범죄예방 디자인 프로그램을 추진하게 된다. 염리동(鹽里洞)은 오래 전부터 소금장수들이 모여 살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소금은 동네를 표현하는 또 다른 상징이기도 하다.


염리동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은 운동 공간인 ‘소금길’ 조성, ‘소금지킴이집’ 운영, 사랑방 역할 및 초소기능을 갖춘 ‘소금나루’ 운영, 디자인으로 채워지는 담벼락 보수, 지역 주민 참여의 ‘자율방범’ 운영 등으로 구성된다. 먼저 인적이 드물고 무섭기만 했던 좁은 골목길은 ‘소금길’ 조성을 통해 운동과 커뮤니티 공간으로 변했다. 1.7km 길이, A,B 2개 코스로 이뤄진 소금길은 도보로 총 40분이 소요되며 전문트레이너가 직접 골목길을 걸으며 맞춤형으로 개발되었다. 소금길 구간의 설정은 주민을 대상으로 심리적 범죄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장소별 지수를 현장에서 측정한 ‘범죄공포지도’를 완성, 여기서 발견된 핫 스팟의 사각지대들을 연결하여 완성된 것이다. 또한 1~69번까지의 번호가 매겨져 있는 소금길 전봇대에는 코스 안내지도, 방범용 LED 번호표시, 안전대처요령 사인, 안전벨 등을 설치해 치안과 동시에 안전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로써 기피대상이었던 골목길은 지역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변모, 자연스레 범죄예방 효과에 대한 높은 기대를 심어줄 수 있었다.

‘소금지킴이집’은 주민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 마련된 방안이다. 소금길 곳곳에 눈에 띄는 노란색 대문을 한 곳이 소금지킴이집으로 이들 집 앞에는 비상벨이 설치되어 있어 위험한 순간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또한 지킴이집은 밤에도 불이 켜지는 사인조명으로 입구를 밝히고, 처마 밑에는 IP카메라를 설치해 현장상황이 녹화되도록 했다. 지킴이집 선정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신청으로 이뤄졌고, 그 중 거리를 감안하여 최종 6가구가 현재 소금지킴이집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소금나루’는 재개발 대상인 염리동 지역 특성상 주민들이 모일 공간이 없었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마련된 사랑방 개념의 커뮤니티 공간이다. 카페, 마을문고, 택배수령서비스, 편의물품판매, 커뮤니티아트 교육 등의 기능을 담은 주민공동체 거점공간으로 24시간 초소기능이 함께하게 된다. 특히 소금나루의 부지는 인근의 자리한 염산교회가 무상으로 제공한 것이라고. 이외에도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했던 낙후된 집 담벼락을 전문디자이너의 코칭과 30가구 주민의 자발적 참여로 도색, 골목 분위기를 밝고 화사하게 변모시켰다.


학교 폭력의 사각지대가 학생들의 놀이터로

강서구 가양동 공진중학교는 13학급, 전교생 286명의 소규모 학교다. 주변에 영구임대아파트가 많은 지역에 있기 때문인지 공진중학교는 상대적으로 저소득 소외계층의 비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교육복지 지표도 열악한 순위로는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학교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학교와 학부모, 학생들의 환경개선에 대한 의지와 관심은 적극적이었다.

우선 공진중학교는 교내에 사각지대가 많아 현재 설치되어있는 CCTV로는 한계가 있다는 문제점 이 있었다. 교내의 사각지대는 언제든 학교폭력, 흡연 등 청소년 비행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이에 CCTV가 없는 사각지대 8곳에 동영상 카메라를 설치했다. 이 동영상 카메라에 포착된 학생들의 움직임은 통행이 많은 현관입구에 설치된 ‘소통의 벽(Dream Wall)’에 송출된다. 이때 ‘소통의 벽’엔 마치 스티커 사진 촬영처럼 다양한 포토샵 처리가 되어있어 재미있고, 자연스런 관찰을 유도한다. 이는 감시 당한다는 느낌 때문에 학생들에게 환영 받지 못한 기존 CCTV에 대한 역발상으로 이제 카메라는 ‘감시’가 아닌 하나의 ‘즐길거리’가 되었다.

또한 페인트칠이 벗겨질 정도로 방치된 교내 사각지대에는 그 공간의 활용을 변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사각지대에는 ‘꿈의 무대(Dream Stage)’라는 장치를 마련, 학생들의 표현욕구를 충족시킨다. 음향 스피커와 조명이 설치된 이 작은 무대에서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춤이나 노래 공연을 할 수 있고, 이 모습 또한 ‘소통의 벽’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또 다른 사각지대에는 ‘스트레스 존’을 설치, 이곳에서는 샌드백이나 암벽등반 등의 장치로 운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게끔 했다. 청소년 비행이 일어나기 쉬웠던 공간이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재미있는 곳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공진중학교의 밋밋하던 복도와 계단도 기분 좋게 변신했다. 윤호섭(그린디자인), 김현선(색채), 이성표(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일러스트레이터), 한명수(시각디자인), 박광수(웹툰), 권형표(건축), 이진오(건축) 등 총 8인의 한국대표 디자이너들이 54명의 자원봉사자,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컬러테라피 디자인을 선보인 것. 이외에도 백석대학교 상담대학원의 재능기부로 학생들의 심리치료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드라마, 독서, 미술 치료 등의 프로그램을 구성되는 심리 치료는 일회성이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 범죄예방 디자인을 중점과제로

위의 서울시 ‘범죄예방 디자인 프로젝트’의 두 사례는 공공서비스디자인에 있어 주민들이나 학생들, 즉 사용자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사용자들의 참여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그들 스스로 발견하게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염리동 주민들의 경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주민들 스스로 소금길과 거점공간을 활용해 자율적으로 순찰을 기획하기도 했으며, 집에 가도 할 게 없다던 공진중학교 학생들은 ‘꿈의 무대’를 중심으로 스스로 공연을 구성하고 순서도 정하면서 방과 후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디자인으로 사용자의 경험을 개선한다는 서비스디자인의 의미가 충실하게 녹아 든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번 프로젝트에는 기업들도 큰 역할을 했다. 삼성은 ‘소금나루’ 구축에 들어가는 비용 1억 4천만원 일체를, 삼화페인트는 소김길과 공진중학교 도색에 필요한 1천 5백만원 상당의 페인트를 기부해 ‘서울 국제 범죄예방 세미나’에서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염리동의 지역 사회적기업에선 소금나루의 택배서비스 운영을 맡으며,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이나 장애인 가정엔 직접 배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공서비스디자인은 공공기관의 올바른 전략과 기획도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의 자발적 참여와 기업의 사회공헌이 함께 어우러져야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울시의 ‘범죄예방 디자인 프로젝트’는 이제 출발 단계다. 단기간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기에 올해 진행된 시범사업은 초기 뿌리를 내리는 과정으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때문에 시는 내년에는 올해 시범사업지 두 곳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주관으로 평가, 보완하고, 염리동의 경우 마을공동체 프로그램과 연계해 운영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아울러 서울디자인재단 내에 ‘‘서울시민디자인정책연구소’를 설치, 내년 중점과제로 범죄예방 디자인을 연구할 예정으로 이와 관련해 서울디자인 재단은 ‘서울 국제 범죄예방 디자인 세미나’에서 영국, 호주의 범죄예방디자인 기관과 MOU를 체결, 각 도시간 사례를 공유 및 추가 발굴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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