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유령 | 2017-06-07
‘그래픽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교육자, 아트 디렉터, 일러스트레이터, 영화감독 겸 엉터리 재즈 피아니스트’ 밥 길이 써낸 이 책은 여러모로 쓸모 있는 디자인 교재다. 길은 30여 년 동안 몇 가지 직업을 거치며 터득한 자신의 디자인 방법론을 관련 작품과 함께 단호하지만 격의 없이 소개한다. 책은 디자인 이전에, 표지에서부터 다짜고짜 이야기를 꺼낼 만큼 중요한 ‘문제’를 건드린다.
문제가 형편없다면 문제 자체를 편집하라!
길은 주어진 일감을 ‘풀어야 할 문제’로, 디자인을 ‘문제를 푸는 과정’으로 여겼다. 그리고 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길은 연필을 들기 전에 문제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문제 어딘가에 있는 독특한 점을 찾아낸 다음 그 점이 드러나게끔 문제를 ‘편집했다.’ 디자인 기술을 구사하는 건 그 다음이었다. 그는 문제만 ‘제대로’ 편집한다면 답은, 다시 말해 디자인은 자연스레 나온다고 믿었다. 그리드를 몇 단으로 짜고, 타이포그래피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등이 아니라, 오직 문제를 어떻게 편집했는지에 책 대부분을 할애한 까닭이다.
무릎을 치게 하는 기발한 작품의 향연
‘이 책에 실린 것까지’ 잊으라며 스스로를 얄궂게 부정하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책은 디자인 교재로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가 30여 년에 걸쳐 제 손을 거친 작품을 주제에 맞춰 선별한 점에서 전기적 작품집으로 여겨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길의 작품을 역사적 맥락에 따라 줄 세우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길의 초기작과 최신작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은 제작 일자를 보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건 무릎을 치게 하는 기발함이나 시치미를 떼고 던지는 (때로는 고약한) 농담, 일요일 아침 같은 느긋함이다.
여전히 곱씹어볼 만한 디자인의 기본
오늘날 디자인 과정은 일찍이 길이 주로 활동한 시대와 달리 컴퓨터와 전문 소프트웨어 몇 개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간소화됐다. 기술의 발전과 대중화는 디자인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고, 디자인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이라도 구글을 과외 선생 삼아 어렵지 않게 디자인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소프트웨어 매뉴얼이나 구글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의사소통’이라는 디자인의 기본을 다룬다는 점에서 책이 설파하는 교훈은 여전히 곱씹어볼 만하다.
P.S. 그나저나 우리는 밥 길의 제안처럼 책에 실린 규칙을 따르지 말아야 할까? 아니면 그마저도 또 다른 규칙으로 거부해 규칙을 하나하나 따라보는 것이 맞을까? 뭐 오래 고민할 거 있나, 그냥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에디터_ 추은희(ehchu@jungle.co.kr)
자료제공_ 작업실유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