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양(tyna@jungle.co.kr) | 2015-11-18
전시도, 축제도, 많아도 너무 많다. 매주 줄을 서서 손짓하는 온갖 행사들을 다 돌아보려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어디선가 본 듯하고 언젠가 열렸던 것도 같은 행사의 급류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그 많은 자리는 누가 다 채우나 궁금한 마음도 든다. 문화·예술 행사의 잠재적 관객이란 어찌나 소수인지! 웬만한 콘텐츠는 검색을 통해 얼마든지 ‘간접 소비’할 수 있는 시대에 일부러 현장에 출동하기란 여간 에너지 소비가 큰일이 아니잖은가. 그러나 동네잔치로 전락하거나 일회성 이벤트로 단명하고 마는 행사들의 수 없는 명멸 속에서도 맥을 쥐는 데 성공한 이 없을 리 없다. 올해로 7회를 맞은 독립출판 축제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 이하 UE 및 UE7)’은 그 모범적인 예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10월의 ‘과자 전쟁’을 기억하는지. 2012년 몇몇 베이커와 파티시에가 뜻을 모아 한남동의 디자인스튜디오에서 출발한 ‘과자전’은 점차 판을 키우는가 싶더니 올해는 아예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을 접수했다. 제6회 과자전은 ‘2015 서울과자올림픽’이라는 콘셉트에 걸맞게 100명 이상이 출전, 깜찍한 아이덴티티와 홍보 기획으로 제법 공격적인 태세를 갖추더니 말 그대로 ‘사고’를 치고 만다. 개장과 동시에 인산인해와 미숙한 진행으로 수라장이 된 데다,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수제 과자들도 판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두 시간 만에 동나버린 것. 티켓 예매자의 휴대전화에는 주최측의 전액 환불 공지 안내가 신속하게 날아왔다. 그 후로도 한동안 과자전은 질타에 시달려야 했는데, 소비자의 실망감은 이해하지만 한쪽 편을 들기도 딱하다. 누군들 ‘과자 덕후 모임’이 이렇게까지 ‘흥’ 하겠다 예상했으랴.
과자전처럼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일을 공유해 보자며 소규모의 조합을 도모하는 움직임은 늘 있었지만, 취지는 소소했을지언정 소박하지는 않은 스케일에 부쩍 놀라게 되는 요즘이다. 기성 자본의 손때를 타지 않은 독자적 무브먼트, 사회 생존 규칙에 복속되지 않는 쿨한 애티듀드는 힙스터(hipster) 문화의 확산에 덩달아 ‘핫’해졌다. ‘힙하다’는 마법의 수식어는 독립이니 대안이니 하는 것들을 부지불식간에 ‘패션’으로 만들었다. 힙스터와 소셜 미디어의 기막힌 컬래버레이션은 20~30대의 감성 틈바구니에 똬리를 틀었고, 여기서 잉태된 인디 문화 신드롬이라는 에이리언은 메이저와 마이너의 얄팍한 경계를 기묘한 몸짓으로 줄 탄다. ‘대림미술관’이나 과자전이 그러하듯이.
소위 대안적 출판문화를 꿈꾸며 등장한 독립출판도 마찬가지다. 주류 출판 업계의 카테고리를 무시한 사적이고 반항적인 이야기, 시장 관습을 비껴가는 디자인으로 무장한 레지스탕스들은 ‘쓰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다. 취업 생지옥에서 보란 듯이 사표를 날리고(〈사표〉), ‘잉여 인간’으로 분류되는 데 부끄럼 없으며(〈월간 잉여〉), 책을 펴내면서도 기꺼이 냄비 받침을 자처하는(〈냄비받침〉) 괴짜들의 자활 운동은 약 2~3년 전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크라우드펀딩으로 십시일반 자본금을 모으고, 여의치 않으면 자비 투입도 불사해야 하는 독립출판은 애초에 장수하기 어려운 운명. 작은 규모뿐만 아니라, 잦은 휴간과 폐간으로 인해 시즌 놓치면 보기 힘든 ‘극한 리미티드 에디션’이 되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출판은 한 시절 풍미하고 사그라지는 백일몽으로 끝나지 않았다. 개개 브랜드의 존폐가 위태로울망정 독립출판물 시장 자체는 어느 정도 안정권에 안착했다. 관련 보도와 행사가 두드러지게 늘면서 독립출판이라는 말도 더는 생경하지 않게 됐다. 진득하니 독립출판을 소개해 온 KT&G 상상마당의 ‘어바웃북스’ 외에도 올해는 세종예술시장 ‘소소’에서 독립출판 플리마켓(flea market, 벼룩시장)이 열렸고, 국립 중앙 도서관에서는 대규모의 독립출판 특별전을 기획했다. 그중에서도 ‘언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말하자면 독립출판 마켓의 ‘원조 할매’ 격이라 하겠다. 홍대의 독립출판 서점 ‘유어마인드’가 매년 주최, 지금은 사라진 홍대 ‘두성종이’에서 2009년 12월 첫선을 보인 이래 일곱 돌을 맞았으니 꽤 유서가 깊은 행사다.
올해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포스터 온리전(2015. 11. 4~5)’과 북 페어(2015. 11. 7~8)로 나누어 4일간 개최됐다. 기존에 판매하던 인디 북, 잡지, 문구류 콘텐츠는 물론이고, UE 사상 전례가 없는 포스터 마켓 ‘포스터 온리전’을 새롭게 추가해 살 거리가 많아졌다. 심지어 올해는 문화 공간이 아닌 미술관에 입성, 본 행사인 북 페어 양일간은 일민미술관 1층부터 3층을 전부 사용한단다. 돌아가는 형세를 보아하니 어째 방문객 900명으로 소박하게 시작했던 UE가 아닐 성싶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지만, 과자전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때라 행사 시작 전부터 지레 겁이 날밖에. 그리고 이 걱정은 단순한 기우(杞憂)로 끝나지 않았다.
유명상, 채병록, 프로파간다 씨네마, 하시시박 등 국내외 유수의 아티스트 및 스튜디오 40여 팀이 참가한 대망의 ‘UE7 포스터 온리전’이 막을 올리던 11월 4일, 일민미술관은 이른 저녁부터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대기 줄이 2층 문턱부터 미술관 입구에 이르는 계단과 통로를 하염없이 에워싼 가운데, 현장 스태프는 출발 지점 기준 한두 시간의 대기 시간을 예상했다. 모든 사태(?)는 쾌적한 관람을 위한 수용 인원 제한에서 비롯된바, 장내는 비교적 여유로웠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랄까. 관객들은 현장에서 포스터를 찍어 SNS에 실시간으로 올리기도 하고, 리플렛과 실제 작품과 제법 신중하게 비교해가며 구매에 임하기도 했다. 계산대 섹션에서는 스태프들이 주문받은 포스터를 선반에서 꺼내 화구통 형태의 보관함에 담느라 분주했다.
포스터 판매 마켓이라는 콘셉트도 흥미롭지만, 마커를 든 디자이너의 모습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포스터 온리전’의 묘미다. “XX번(작품 번호) X장이요!”하는 스태프의 외침이 오고 가는 가운데, 전시장 한켠에 마련된 테이블에서는 스팍스에디션&이규태와 신모래의 사인회가 열리고 있었다. 신모래는 포스터 귀퉁이에 메시지와 함께 즉흥 캐리커처를 일러스트레이션했고, 스팍스에디션&이규태는 구매자가 넘겨 준 네 자리 숫자를 포스터 위에 컴퍼지션(composition)하는 독특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다.
본 행사가 열린 11월 7일과 8일에는 비가 내렸지만, 우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사는 더욱 성황이었다. 미술관 밖에 설치된 간이 천막은 물론이고, 전시장 내부까지도 너무나 붐벼 다른 관객들의 동선을 따라 엉금엉금 이동해야 했다. ‘포스터 온리전’보다 훨씬 많은 볼륨의 콘텐츠가 3개 전시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어 차근하게 살펴보려면 시간이 부족할 정도인데도, 이미 몇몇 부스에는 품절 팻말이 걸려 있어 전시장을 다녀간 인파를 가늠케 했다.
본 행사 판매는 ‘포스터 온리전’과는 달리 해당 부스에서 제작자와 구매자가 직거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책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만드나?’ 싶었던 이들에게는 꽤 흥미로운 자리가 되었을 법하다. 장내를 돌다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출발해 전문가 못지않은 ‘덕력’을 뽐내는 책들이 관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개중에는 원고 절반을 역방향으로 편집하거나 교정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는 등 새로운 읽기 방식을 제안하는 출판물들도 눈에 띄었다.
UE7에서는 독립출판 외에도 오디너리피플, 활자공간, 파티(PaTI,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등 스튜디오 및 학교가 출판 작업과 굿즈를 선보였고, 안그라픽스(16시), 지콜론북, CA 코리아 등 제도권에 속해있다 할 업체들도 판매 부스를 배정받았다. 그러나 관객들을 가장 기갈나게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엉뚱하고 괴상스러운 독립출판물일 터. 이에 참여 부스 가운데서도 참으로 ‘독립출판’스러운 몇몇 간행물을 소개한다.
잉여 네버 다이: 〈(격)월간 잉여〉
‘잉여’가 죽지도 않고 또 왔다. ‘청년 잉여론’이 유행하던 시절 개간했으니 〈(격)월간 잉여〉는 생명력이 길지 않은 독립출판물치고는 꽤 연식이 있는 매체다. 2015년 11월~12월호의 주제는 ‘흑역사’. 차례만 훑어봐도 여전히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잉여 편집장 ‘잉집장’의 센스를 느낄 수 있다. 한국 최저 시급에 준하는 5,580원의 판매가격은 잉여들에게도 부담 없겠다. 평론가 강준만과의 인터뷰 등 굵직한 기획을 보면 이 잉여가 예전의 잉여 맞나 위화감도 들지만…….
이거 ‘짭’ 아니에요?: 문학과 죄송사
시 좀 읽어본 독자라면 ‘문학과 죄송사’ 시리즈의 표지를 보자마자 빙그레 미소 짓게 될 것이다. 직직 그린 일러스트와 표지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제외하면 빼도 박도 못하게 문학과 지성사의 시그니처 시인선을 닮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죄송사는 등단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마추어 시인들을 위한 ‘대리만족’ 출판사다. 뭐가 그리 죄송한지 표지 뒷면에는 소심한 바탕체로 ‘죄송합니다’라고 적어 뒀고, 문학과 죄송사를 소개하는 글도 ‘죄송합니다’라는 다섯 글자가 전부다. UE7 현장에서는 문학과 죄송사 로고가 프린팅된 안전모와 고무장갑 등의 굿즈를 함께 판매했다.
예쁘니 좋지 아니한가: 〈아침(Achim)〉
아기자기한 인스타그램 감성이 물씬 풍긴다. 단순히 아침이 좋아서 만들었다는 라이프 매거진 〈아침(Achim)〉에는 아침을 주제로 한 인터뷰, 에세이, 레시피, 리뷰 등이 담겨 있다. 일반적인 잡지처럼 페이지를 넘기는 제본 방식이 아닌 접이식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출간, 펼치면 포스터처럼 활용할 수 있어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쓸모가 있다. 아침(Achim) 부스에서는 신간 3호 〈Act: do something〉을 비롯해 절판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1호 〈Break+Fast〉와 2호 〈Vaccance!〉 재발행 본을 함께 판매했다.
남자만 도색잡지를 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 〈젖은 잡지〉
최근 독립출판계에서 가장 ‘핫’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젖은 잡지〉도 UE에 참여했다. 여성이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제작하는 〈젖은 잡지〉의 내용물은 음란하고, 적나라하고, 때로는 유치하다. 남성의 성 판타지를 실현하는 도구로 존재해 온 여성이 ‘감히’ 성의 주체로서 욕망을 선언하고 나섰으니 기성 세대에는 제법 발칙하게 느껴질 터. 매호 금기적 소재를 테마로 잡아 화보, 칼럼, 소설, 리뷰 등을 실어 온 〈젖은 잡지〉는 도색 잡지의 껍데기를 쓴 아트북이라 하겠다. 막 발간돼 따끈따끈한 5호의 주제는 시의적절하게도 근래 소란을 피웠던 뜨거운 감자, ‘롤리타’다.
108번뇌의 직장인을 위한 폭풍 공감 백서: 〈사표〉, 〈삼년차 직장인〉, 〈다시 신입사원〉
“시작하는 사표, 사막에 길을 내는 사표”, “이렇게 다닐 수도 없고, 이렇게 관둘 수도 없을 때 삼 년 차는 온다”, “다시, 이직만이 희망이다”. 직장인이라면 표지 문구만 읽어도 ‘뽐뿌’가 온다. 업무에 치이고 상사에 까이며(?) 심리적 피곤이 누적되다 못해 림보 상태에 빠진 직장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계발서나 처세서가 아니다. 사표를 욕구를 억누를 수 없을 때, 이직 충동이 쓰나미처럼 밀려들 때, 백수로 사회 등급이 하향 조정되었을 때 이 책들을 펼쳐보자. 나의 질풍노도와 분노조절장애도 수많은 직장인이 거치는 자연스러운 단계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못 살겠다, 갈아 보자: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
계간지 〈Graphic〉을 출간하고 있는 프로파간다 프레스에서 펴낸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은 책 제목 그대로 한국 부정선거의 엑기스를 담은 도감이다. 건국부터 2012년까지 한국 근현대사에 얼룩진 부정선거 기법, 사건, 인물 프로필 등의 관련 사실을 적시했으며, 다 읽고 나면 문제지를 통해 부정선거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텍스트는 볼드한 고딕체로 건조하게 기술되어 있는 반면, 초등학교 생활 교육 교과서 〈바른생활〉을 연상시키는 낡은 일러스트레이션은 프로파간다 내지는 ‘삐라’ 같은 인상을 불어넣는다. ‘이런 책 봐도 되는 거야?’ 싶겠지만, 겁내지 말자. 〈에센스 부정선거 도감〉은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과 별다를 바 없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보지파티
지난해부터 사회를 뜨겁게 달궈 온 페미니즘 논쟁의 열기는 독립출판계에도 옮아 왔다. 세 명의 레즈비언이 결성한 ‘보지파티’는 여성의 성을 부끄럽고, 거북하고, 감춰야 하는 금기의 영역으로 통제하는 사회적 구속에 반발, 여성이 자신의 성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대가 도래하기를 염원하는 행동 단체다. 이들은 LGBT를 위한 F&A 안내서 〈이런 질문도 괜찮아요.〉 등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출판물을 들고 나타났다. 특히 근 일이 년 간 출판업계의 불황에서 예외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컬러링 북의 인기를 의식한 듯한 〈보지색칠책〉이 독특하다.
털을 무시하지 마라: 〈털보고서〉
‘체모’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있는지. 양띠, 말띠, 뱀띠 세 남자가 모여 결성한 ‘양말뱀’ 편집부는 우리가 그토록 제거하고 싶어하는 털에 대해 쓰고 그렸다. 털에 대한 과학적 정의와 분류부터 그루밍하는 법, 털로 보는 관상, 고전 회화에 등장한 체모의 예까지, ‘털’에 대한 기상천외한 정보를 총망라했다. 페이지마다 털투성이지만, 단순한 선으로 그린 흑백 일러스트가 소소하게 웃겨 주며 거부감을 중화시킨다. 한 장 한 장 넘겨보고 있으면 체모에 대한 없던 친근감도 생기는 기분이다. 〈털보고서〉를 정독하고 나면 어느 날 남자친구가 기르고 나타난 수염도 밉지 않게 보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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