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06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문명의 발전과 함께 책은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 적이 있다. 출판 시장의 위기 역시 이러한 의견을 뒷받침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 수십 권의 책이 출판되고 있으며, 독립 출판물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이렇듯 책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소중한 가치로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지털은 잊기 위함이고, 아날로그는 간직하기 위함이다.’(Digital is made to forget, Analogue is made to remember.)라는 사진가 로버트 폴리도리(Robert Polidori)의 말은 그 답이 될지도 모른다.
에디터 | 정은주(ejjung@jungle.co.kr)
자료제공 | 대림미술관
4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책을 만들어오면서, 아트북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게르하르트 슈타이들(Gerhard Steidl)의 전시가 대림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슈타이들은 패션, 사진, 문학, 회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의 책을 매해 400여 권 이상 출판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퍼블리셔(Publisher)다. 인쇄와 출판의 전 과정은 슈타이들 빌레(Steidlville)라고 불리는 그의 출판사에서 직접 검토하고 지휘하는 한편, 세계적인 예술가와 긴밀한 협업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를 필두로, 팝 아티스트 짐 다인(Jim Dine),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와 샤넬의 칼 라커펠트(Karl Lagerfeld) 등 그 면모 또한 화려하다.
슈타이들은 책이 가진 고유한 물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늘 새로운 아이디어로 개성 있는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종이를 선택하고, 타이포그래피, 이미지 선택을 비롯해 출판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세심한 정성을 기울이는 그의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Jungle : 2011년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WORK IN PROGRESS’, 올해 초 비욘드 뮤지엄의 ‘CHANEL LITTLE BLACK JACKET’에서는 큐레이터이자 전시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작가로서 한국을 찾았는데, 소감이 어떤가?
이번 전시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큐레이터와 작가라는 경계를 넘어서서 ‘선생님’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전시가 출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적인 측면을 담고 있는 동시에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Jungle : 이번 전시에서는 종이의 재질, 타이포그래피 등을 통해 출판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전시를 통해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책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디테일하고 치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에 어울리는 타이포그래피를 찾는 일만 해도 e-book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e-book은 대부분 스탠다드한 타이포그래피를 사용하지만, 출판에서는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가독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타이포그래피에 따라 눈의 피로나 콘텐츠에 대한 집중력이 달라진다고 했다. 책은 이렇듯 작은 부분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만들어지므로, 좀 더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또한, 요리책의 레시피를 따라 하다 보면 맛있는 요리가 완성된다고 하지 않나. 이번 전시를 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만드는 과정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다.
Jungle : 출판의 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독립 출판에 대한 관심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줄곧 종이와 책으로 작업해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갖고 있는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든 원하는 모든 정보를 손쉽게 접한다. 그중에서 금방 잊어버려도 되는 것이 있다면,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해야 하는 지식도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철학자나 과학자,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고 연구했다. 이러한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해도,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을 습득하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종이와 책은 이러한 사고의 흐름을 잘 담아낼 수 있는 이상적인 매체라 생각한다.
Jungle : 40여 년 동안 출판을 해왔다. 출판 환경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을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 대처해왔는가?
프레스와 프린팅, 북 바인딩을 제외한 모든 과정이 변화했다. 우리는 책을 만드는 과정이 무언가를 발명하고 실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출판 과정이 디지털화되었다곤 해도 책이 갖고 있는 본래의 감각들을 살리는 것이 목표다. 스크린에서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직접 넘겨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디테일한 감각을 살리기 위해 종이의 재질이나 디자인 등 모든 과정을 고려해 제작하려 한다.
Jungle : 책을 만드는 과정을 잠수함에 비유했다. 그만큼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일 텐데, 평소 작업 방식은 어떤가?
책을 만드는 과정은 굉장한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다. 5분에 한 번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전화를 하면서는 좋은 작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외부와는 단절된 잠수함에 비유했다. 책을 만들 때 오롯이 책에만 집중한다.
Jungle : 문학, 미술, 디자인, 사진 등 예술 전반의 책을 출판하고 있다. 어떤 관점을 갖고 책을 제작하는가?
프로젝트에 대해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협업하는 아티스트의 작업이 궁금하고, 그 본질을 발견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면 작업하는 것이다.
책은 시중에 판매하는 흔한 공산품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데 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러한 관점이 책을 만드는 데 독립성을 부여해준다.
Jungle : 한 인터뷰에서 이제까지 만들었던 책 중에 어떤 책이 가장 좋았느냐는 질문에 앞으로 나올 책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책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경험이 늘어나는 것 같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지난번보다 좋은, 프로젝트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믿는다.
Jungle : 로버트 프랭크, 칼 라거펠트, 귄터 그라스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 오랫동안 긴밀한 협업 관계를 맺어왔다. 이들이 낸 많은 책들은 모두 다 다른 사이즈와 재질로 만들어져, 개별적인 작품으로 느껴졌다.
스탠다드가 정말 싫다. 다른 출판사에서는 비용적인 문제를 들어 두, 세 가지의 규격을 정해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책을 만드는 과정을 규격화하고 싶지 않다. 사람이 태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듯 책 역시 하나, 하나가 개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티스트와 협업을 할 때도 아무것도 정해 놓지 않는다. 마치 아이들이 해변가에서 모래성을 쌓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내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들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
Jungle : 처음 작업한 책은 무엇이었으며, 앞으로 책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스물두 살이었던 1972년에 만든 ‘questioning documenter’이다. 국제적인 전시에 대한 비평을 담고 있었다. 정치적 참여를 독려하는 전시 콘셉트나 아트 메이킹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였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책을 만들고 싶었다.
책을 대량 생산하는 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하이 퀄리티의 북 아트는 역량을 가진 인재와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국 역시 독일처럼 이러한 자원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갖고 있는 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책들을 펼쳐 보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