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24
2010년의 마지막 달, 미국 국립예술기금(NEA)의 브랜드를 리뉴얼한 김정훈씨를 만났다. 뉴욕에서 디자인 스튜디오 ‘Why Not Smile’을 운영하고 있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디자인을 만들어가는 그의 이야기와 디자인 철학에 대해 들어보자.
취재 │ 한국디자인진흥원 정보지원실 이현주(hlee0227@kidp.or.kr)
기사제공 │ 디자인DB (designdb.com)
Q. 디자인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예를 들어,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책이나 작가, 주위 환경이 있다면 말해달라.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없다. 지금 돌이켜 보면, 유명한 디자이너나 특별한 책 보다는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듯 하다. 아버지는 디자이너도 예술가도 아니시지만,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들을 진행하시는 것을 지켜보면 마치 디자이너의 모습 같기도 하다. 프로젝트, 철학, 프로세스, 장인정신이 베어있는 결과물 등 실제 디자인의 그것들과 꼭 빼 닮은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란 영향이 크다고 본다.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건 중학교 시절이다. 그 당시엔 지금 하고 있는 일과는 많이 다른 자동차 디자인에만 관심이 있었다. 실제 대학교 전공도 산업디자인과로 진학을 했고, 공업디자인보다는 시각디자인에 매력을 더 느껴서 대학교 3학년 때 시각디자인과로 전과를 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시각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제품으로써의 결과물까지 바라 본다던지, 혹은 프로젝트 안에 공업디자인의 요소가 녹아 있다던지 하는 특색을 갖게 됐다.
Q. 유학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교 졸업 후, 수년간 크로스포인트, 이미지드롬, 프리챌 등에서 브랜딩, 웹사이트, 편집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했다. 항상 상업디자인의 최전선에서 일하다 보니, 실험적인 디자인이나 사회를 위한 공공디자인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2000년 초중반에 유학을 마치신 선배들의 전혀 새로운 작업과 가치관도 큰 충격이었다. 그러한 커리큘럼을 갖고 있는 학교를 찾던 중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RISD,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MFA과정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RISD에서의 2년 간의 연구는 디자이너로서의 내인생의 최고의 순간이었다. 각자가 정한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치열하게, 즐겁게, 열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양한 연구들은 실제 산업에서 어떻게 응용이 될 것인가 보다는, 과정을 통한 디자인 방법론과 철학, 가치관의 정립을 우선으로 한다.
Q. 한국의 디자인(디자이너) 환경과 뉴욕의 디자인(디자이너) 환경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가?
뉴욕의 그래픽디자인 커뮤니티는 세계 최고로 꼽을 만큼 거대하다. 규모가 큰 이유 중 하나로 소규모 스튜디오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도 최근 들어 소규모 스튜디오들이 약진하고 있지만 아직도 장벽이 크다는 소식을 종종 전해 듣는다. 대조적으로, 뉴욕의 스튜디오들은 거대 클라이언트와의 장벽이 그다지 크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클라이언트로부터 예상치 못한 큰 기회가 계속해서 찾아온다. 뉴욕의 디자인 문화 자체가 새롭고 신선한 디자인, 디자이너, 스튜디오를 끊임없이 갈망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회가 전부 프로젝트 수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동등한 가능성이 외국인인 나에게도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뉴욕에는 2 - 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수가 쉽게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대부분의 스튜디오들이 유명 클라이언트를 대상으로 질적으로 우수한 작업들을 쏟아내고 있다.
Q. ‘Why Not Smile’이라는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튜디오 이름 'Why Not Smile'의 유래와 스튜디오에서의 생활이 궁금하다.
10여 년 전 즈음 R.E.M의 Why Not Smile이란 노래를 즐겨 듣곤 했는데 스튜디오의 이름은 이 노래 제목에서 왔다. 구글 검색을 해보면 화면 상단에 스튜디오와 R.E.M의 노래가 나란히 뜨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계획 중이던 공공 프로젝트의 이름을 찾던 중에 이 노래 제목과 내용이 성격에 잘 맞아 곧바로 도메인을 등록했다. 그 이후 개인적인 공공 프로젝트에 Why Not Smile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해 오다가, 스튜디오 이름으로 전환시켰다. 조금은 가벼운 부정문장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뉴욕 현지에서는 주로 철학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와이낫스마일은 예술, 건축, 문화, 패션 영역의 디자인을 하는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이다. 인쇄물, 브랜딩, 웹사이트 등 미디어의 경계 없이 그래픽디자인 전반을 다 다루고 있다. 창업한 지 2년도 채 안되었기 때문에 아직은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며, 내년 중반부터는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오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다. 지식경제부와 KIDP에서 지원하는 차세대디자인리더, 포스트차세대디자인리더 등의 프로그램도 스튜디오가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는 직원 세 명의 단출한 스튜디오로 디자이너 세 명이 100% 소화하기 힘든 정도의 프로젝트 양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문화부 격인 연방정부의 국립예술기금의 기관 아이덴티티 작업을 진행하고, 뉴욕의 유명 미술관들과 전시 아이덴티티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를 하는 등 다양한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 중이다. 향후 성장여부에 따라 10여 명 규모로 확장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Q. 스튜디오는 어떻게 열게 되었나? 한국에서도 어려웠을 스튜디오 오픈을 외국에서 했을 때 겪은 어려움에 대해 듣고 싶다.
외국인으로서 비자문제만 해결되었다면 창업에 대한 서류상의 어려움은 없다. 창업자체는 쉽지만, 고정 수입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창업 이후가 주요 고려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실력과 인맥을 사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듯, 뉴욕도 인맥의 중요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나의 경우, RISD의 교수 중에 뉴욕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초기에 프로젝트 수주 등에 외국인으로서의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조금 아쉬운 점은 뉴욕의 다양한 디자인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창업을 했다면, 시행착오도 적을 뿐 아니라 보다 풍성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일할 수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창업이 목표라면, 먼저 현지에서의 실무경험을 많이 쌓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Q.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디자인 스튜디오를 열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유학이든, 창업이든 외국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문제일 것이다. 언어가 조금 모자라니 실력으로 승부하라는 현실적으로 도움되지 않는 말은 생략하겠다. 실제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유학을 오는 학생들이 많은데 이곳에서 선생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확실히 말씀 드리겠다. 물론 한국 학생들이 미국 학교들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학은 본인의 실력을 뽐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공부'나 '연구' 혹은 '자기발전'이 목적일 것이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본인의 디자인 결과물보다는 동료, 교수와의 토론과 연구를 통해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고, 그것에 대해 비싼 학비를 지불한다고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유학에 뜻이 있다면 본질적으로 '왜' 하려는 지 고민하고 먼저 언어능력을 쌓는 게 중요하다.
실무도 마찬가지다. 이 거대한 커뮤니티에 비슷한 능력의 디자이너나 스튜디오는 넘쳐난다. 이런 환경에서 고용회사나 클라이언트가 굳이 언어가 완벽하지 못한 외국인 디자이너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실력만으로 부딪히기엔 너무 단단한 장벽이 아닌가 싶다. 언어는 나의 개인적인 문제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학생들을 만나러 수업에 들어갈 때나,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회의실에 들어갈 때, 언제나 이 문제로 조금은 떨리는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더욱 강한 어조로 조언을 드리고자 한다.
Q. 지금까지 한 많은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 그 이유와 작업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워크 온 레드(Walk on Red)가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NYC 311 Noise Complaints를 바탕으로 뉴욕시의 이미지를 만드는 연구 프로젝트로, 콜롬비아 대학교 건축과 교수인 새라 윌리엄스(Sarah Willams)와 공동으로 작업하였다. 이 작업은 뉴욕의 Broadway Avenue를 직접 걸으며 채집한 자료와 공식적인 자료들, 그리고 이의 분석 등, 모든 연구과정의 기록물이다. 긴급통화 번호인 911과 같이 뉴욕에는 311 다이얼이 있는데, 그 중 NYC 311 Noise Complaints는 소음신고 당시 위치와 시간, 신고자의 다양한 상태가 기록되어 지역별, 시간별 소음을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이다. 맨하튼의 이 소음신고의 분석은 인구밀도, 대지의 사용용도, 인종, 평균 수입, 연령 등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이를테면, 소음이 많을수록: 1) 인구밀도가 높고, 2) 월등한 거주지역이거나, 거주지역과 상업시설이 복합적이고, 3) 가구당 평균수입이 낮다. 이 외에도 다수의 긴밀한 연관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소음신고의 데이터를 사용한 이미지 시각화가 그 지역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최종의 지역 아이덴티티는 Triangulated Irregular Network (TIN) 데어터 구조를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책 출판에 맞추어 뉴욕 첼시와 스위스 로잔에서 전시되었다. 연구, 출판, 전시의 모든 과정이 KIDP의 차세대디자인리더의 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Q. 국립예술기금(The US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이하 NEA)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과정을 설명해달라.
미국 국립예술기금(NEA, The US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의 브랜드 리뉴얼 작업은 공개공모(RFP, Request for Proposal)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문화예술 매체에 공고가 나갔고 디자인 회사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 당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높은 진입장벽의 여건과 한계가 오히려 과감하고 진보적인 디자인을 가능하게 했고, 이로 인해 제안서를 제출한 미국 전역의 650여 개의 디자인 회사 중에 와이낫스마일이 최종 선정되는 결과를 낳았다.
기본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의 수주 후, 브랜드 어플리케이션 디자인 시스템 프로젝트를 추가로 수주하여 총 6개월에 걸쳐 진행을 했다.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 중간 선거 등의 영향으로 디자인 공개가 금지되어 있었으나, 2010년 12월 15일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가 되며, 내년 2월 중 존 마에다가 총장으로 있는 로드아일랜드디자인학교(RISD, Rhode Island Schoold of Design)에서 백악관 상원의원, 정부기관장, 다양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브랜드 리뉴얼 선포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미국 국립예술기금은 연방정부의 문화예술분야 최상위, 최고규모의 기관으로 미국의 문화예술 분야를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기관 명칭의 '예술(Art)'이라는 단어가 자칫 우리에겐 한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이는 미술, 음악, 문학, 공연, 디자인, 영화 등의 모든 창작문화예술을 통칭하는 것이다. 미국국립예술기금에서는 우리나라의 문화훈장 격인 국립예술메달(National Medal of Arts)을 매년 대통령에 의해 수여하는데, 2009년에는 밀튼 글레이저가 그래픽디자이너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메달을 수여 받아 디자인계의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Q.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본인의 노력)를 공개해달라.
해를 더할수록, 프로젝트 수가 늘어날 수록, 디자이너에게는 끊임없는 자기개발이 중요함을 느낀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디자인과 회사 밖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디자인활동이 서로를 보완하고 지탱해주는 것을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 디자인 활동이 꼭 컴퓨터나 볼펜 등의 도구만으로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다양한 책을 통해 폭넓은 사고를 할 수도 있겠고, 일상생활의 관찰과 기록을 통해 날카로운 눈을 가질 수도 있다. 창조성(creativity)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나열된 조각들을 어떻게 맞추는지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Q. 앞으로 스튜디오가 나아갈 방향, 지향하는 바에 대해 말해달라.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항상 본인들이 하는 일이 단순히 아름답고 멋진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 업무에서는 시간, 자금 등의 여러 환경에 쫒겨 결국은 단순히 '쿨'한 디자인으로 프로젝트를 종결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러한 디자인 과정에서의 구조적 폐해를 바로잡고, 과정도 결과물만큼 중시하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스튜디오를 그리고 있다. 일례로 프로젝트에 대한 사전리서치의 경우, 관련 이미지 리서치뿐이 아닌, 관련 분야의 정보, 다각도의 견해 등 텍스트 리서치, 즉 공부가 더 중요함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언젠가부터 '디자이너의 글쓰기'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데, 글쓰기는 뒤로 미루더라도 최소한 '디자이너의 글읽기'는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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