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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월드리포트

삶의 시간이 예술이 되어 흐르다

유수민│뉴욕 | 2013-04-19



종종 전시를 보다 보면, 예술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을 보게 된다. 너무 추상적이어서 의문이 든다거나, 예술적인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또한 작품이 너무 가벼워서 심하게는 천박하게 느껴져서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감상도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어디까지가 예술인지를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특히 현대미술은 그 경계가 상당히 모호하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는 아름답게 묘사된 그림이나 조각 등을 예술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늘날에는 예술의 장르와 주제가 굉장히 광범위하고 다양해졌다. 예술의 흐름 역시 빠르게 전개되고 있어, 그 흐름을 가늠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예술에도 경계가 존재하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또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 디터 로스(Dieter Roth)와 그의 아들 비욘 로스(Björn Roth)의 특별한 삶의 전시를 소개한다.

글, 사진│유수민 뉴욕 통신원(smyoo1017@gmail.com)


일상 속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툭탁거리는 소리를 따라 하우저&워스(Hauser & Wirth) 갤러리 2층 전시장에 들어섰다. 전시장 입구에는 디터 로스의 일상을 기록한 조그만 모니터들이 가득했다. 스케치와 페인팅 작업하기, 화분에 물 주기, 화장실에서 책 보기, 샤워를 하고 나오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담겨 있는 이 128개의 비디오는 시간의 연장, 그리고 죽음에 관한 겸손과 간결함 등을 느낄 수 있었다. 각각의 모니터 아래에는 마치 일기처럼 녹화 날짜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디터 로스 또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모습에 잠깐이나마 그의 일상을 엿볼 수가 있었다. 하나씩 본다면 이게 그리 특별한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일상의 단편적 순간을 담은 128개의 영상이 가지는 힘은 정말 특별했고, 영화 ‘트루먼 쇼’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는 일렬로 늘어선 드로잉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일상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시간에 대한 고찰과 기록이었다. 드로잉과 영상 작품들은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의 손을 거친 모든 것이 예술이 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작품세계에 한계는 없었던 듯하다. 
    

한편, 그의 페인팅에는 국자, 신발, 병뚜껑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익숙한 것들이 가득했다. 작품들을 보면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던 그는 그가 아는, 가진 거의 모든 것을 그의 작품에 투영시킴으로써 예술로 승화시켰다. 재료가 뿜어내는 에너지와 그의 손을 거쳐 재 탄생된 작품은 시너지효과 그 자체였다.




전시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재료는 초콜릿이었다. 갤러리 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초콜릿 향기는 관람 내내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디터 로스의 초코릿 타워와 슈거 타워를 그의 아들 비욘 로스가 물려받아 계속 진행함으로써 시간에 관한 그의 작업은 대를 이어 네버엔딩 프로젝트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들이 이어가는 작업은 시간이 갖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었다.



해리포터와 같은 판타지 영화에 나올법한 설치작업은 복잡하고 어수선하면서도 뭔가 모를 신비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괴짜 할아버지가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에 둘러싸여 타임머신이나 기발한 발명품을 만들어내서 굉장한 모험을 하게 될 것만 같은 상상력이 발휘될 정도로 보는 내내 흥미로웠다. 이렇게 복잡한 설치는 누가 어떻게 했을지 궁금할 정도였는데, 이 전시가 디터로스 사망 후 그의 아들 비욘 로스와 두 손자가 함께 준비하며 재설치를 한 것이라고 하니 한 가족의 땀과 열정이 담긴 가족전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로스 家의 또 다른 야심작은 하우저&워스 갤러리 안에 마련된 커피 바 였다. 로스뉴욕바(Roth New York Bar)는 비욘과 그의 아들 오더 로스가 함께 작업했으며, 이곳에서는 커피와 음료를 팔고 있었다. 로스뉴욕바는 전시가 끝난 후에도 계속 남아 하우저&로스 갤러리의 명물이 될 것이다.

요즘에는 조상이나 부모를 따라 가업을 잇는 경우를 좀처럼 보기 힘들다. 게다가 미술계에서 부모님의 작품을 가업처럼 이어 나가는 경우는 본 적이 없어서 이번 전시가 정말 특별하게 여겨졌다. 장인정신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일상과 시간에 대한 고찰과 기록, 그리고 그것을 후손들이 이어감으로써 만들어진 또 다른 시간. 어쩌면 평범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었던 일상도 예술로 승화시킨 로스 가족들에게는 예술, 그리고 나아가 이를 만들어가는 시간에 경계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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