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 ㅣ 런던 | 2013-11-29
바우하우스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작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는 장난기 있으면서도 급진적인 색을 가졌던, 유럽 현대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지난 10월부터 내년 봄까지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선보이고 있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전시를 통해 그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다.
글 ㅣ 김도영 런던통신원(chloe.dy.kim@googlemail.com)
<파울 클레>전은 시대적 배경과 그의 작품들을 연관 지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진다. 작가는 1차 대전을 겪고,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사망했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고스란히 겪어낸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전시된 그의 작품들은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과거의 역사를 거스른다. 전시시대, 독일에서 급진적인 사상의 예술가로 살았던 사람의 삶은 어떠했을지, 그 삶 속에서 나온 작품들은 어떤 빛을 사용하고 어떤 선으로 그 세계를 표현했는지 간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 구성에 따라 이번 소식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의 삶과 작품을 요약해 전해본다.
1879
파울 클레는 음악 선생님인 독일인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인 스위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모두 음악을 하는 분들 이었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고 배우게 된다. 그의 가족은 스위스 베른(Bern)에 있지만, 그의 부모님은 그가 독일 국적을 갖도록 했다.
1866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그는 바이올린과 오페라를 배웠고, 그림도 많이 그렸다. 음악과 미술 둘 다 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1896
베른 뮤직 소사이어티 오케스트라(Bern Music Society orchestra)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고 정기적으로 콘서트에도 참여한다.
1898
베른에서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그림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독일 뮌헨으로 옮긴다. 지원했던 예술학교에 떨어지고 사설 그림 학원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다. 히틀러의 초상화를 그려 유명한 하인리히 크니어(Heinrich Knirr)와 이때 함께 공부한다.
1900
숍 점원 아가씨와 연애를 하게 되고 그녀가 임신을 한다. 태어난 아기는 몇 주 살지 못하고 사망한다. 그가 다니던 미술 학교에서 명망 있는 선생님으로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전통적인 지도 방법에 점차 불만을 갖기 시작한다.
1901
그의 아내 릴리 스툼프(Lily Stumpf)와 비밀리에 약혼을 한다. 그리고 6개월동안 조각가 친구와 이태리 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 곳에서 역사적 예술작품들을 보고 지금까지 그가 존경했던 현대 예술이 과거 걸작들의 조잡한 흉내내기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하며 한탄한다.
1902
부모님이 계신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고, 4년에 걸쳐 방대한 양의 독서와 공부를 하며, 자신만의 예술적 정체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기간 경제적인 수입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을 하며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음악 실력 또한 뛰어났다.
1910
처음으로 단독 전시회를 베른에서 열게 되는데, 이 전시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시를 접한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몇몇의 유명 평론가들은 전시를 멈추도록 권고했다.”
1911
친구의 소개로 칸딘스키(Wassily Kandincky)를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표현주의 화가 그룹이었던 청기사(Der Blaue Reiter)멤버로 참여하게 된다. 이 곳에서 만난 예술가들은 평생 그의 친구가 된다.
1914
화가 친구들과 2주동안 튀니지(Tunisia)를 여행한다. 이 여행 기간 동안 빛, 풍경 그리고 아랍세계의 음악, 건축, 문화를 접하며 느낀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수채화를 그린다. 그리고 이렇게 글로 표현한다. ‘컬러는 나를 지배한다. 그래서 나는 굳이 그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컬러는 언제나 나를 지배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행복한 여행에서 내가 찾은 의미이다. 컬러와 나는 하나다. 나는 화가다’
같은 해에 세계 1차 대전이 시작되고, 그와 친한 친구였던 러시아인 칸딘스키는 이제 그의 적으로 간주되는 세상이 됐다.
1915
전쟁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 시기부터 방대한 양의 추상화를 생산해내기 시작한다. ‘세상이 흉악해지면 흉악해 질수록 우리의 예술은 더 추상적이 된다’
1916
절친한 친구가 전쟁에서 사망하고 파울 클레는 절망에 빠진다. 그 또한 곧 군대로 징집된다. 다행히도 너무 많은 예술가들의 죽음이 이유가 되어 생긴 새로운 정책으로 인해 전방에서 근무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1918
11월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그는 뮌헨으로 돌아온다.
1919
베를린에 공화주의 정부가 서고, 파울 클레는 혁명 예술가들의 모임에 참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정은 군대에 의해 무너지고, 이때 700명의 공화정 지지자들이 감옥에 수용되거나 처형당했다.
이를 피해 파울 클레는 스위스에 계신 부모님들을 뵈러 가고, 이 곳에서 세계 1차 대전의 처참함을 반성하며 전쟁을 반대하는 다다(anti-art Dada group)의 멤버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파울 클레는 ‘오일 트렌스퍼(oil-transfer)’ 방법을 개발한다. 백지를 그림이 그려진 종이 밑에 깔고 그림전체 또는 디테일을 따라 그림으로써 아래에 깔린 종이에 그 오일들이 찍히는 방법인데, 그의 작업 중 여러 작품이 이 같은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1920
Creative Confession이라는 제목의 글을 출간한다.
“‘예술은 보이는 것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보임’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1921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기초 수업들과 책 제본을 가르친다. 이곳에서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던 또 다른 바우하우스의 거장 게오르그 무셰(Georg Muche)의 이야기에 따르면 클레가 첫 수업을 할 때, 교실 뒷문으로 들어가 바로 직진해 학생들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칠판으로 가서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첫 수업에 긴장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수업 전에 항상 매우 자세하게 수업내용을 적으며 미리 준비를 했다고 한다.
1923
이 때부터 많은 전시를 하고 바우하우스 전시 카탈로그에 그의 글이 실리기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한다. 당시 독일은 매우 높은 실업률과 최정점에 도달한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독일에 히틀러(Adolf Hitler)가 등장한다.
1924
독일의 경기가 계속 나빠지고 그로 인해 예술시장도 점차 침체되어갔다. 이에 당시 유명한 수집가였던 샤이어(Galka Scheyer)는 4명의 예술가들을 모아 Blue Four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기획했고, 이 이름으로 4명의 예술가들을 묶어 미국에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Blue Four 멤버는 클레(Klee), 칸딘스키(Kandinsky),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야블렌스키(Alexei Jawlensky)였다.
바우하우스가 속한 지역의 지방 선거에서 우파 정당이 다수표를 얻음으로써, 바우하우스의 재정지원은 반으로 격감되고 교수진들의 계약도 강제로 종료되었다.
1925
원래 바우하우스가 있던 곳에서 학교를 운영하기 어려워지자 그들은 데사우(Dessau)로 학교를 옮긴다.
그리고 파리에서 클레의 첫 전시가 열린다. 초현실주의 시인이었던 루이스 아라곤(Louis Aragon)은 전시 카탈로그에 이렇게 글을 적었다.
“ 빛, 품위, 영성, 매력, 능숙함 이런 단어들을 빼고 그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섬세한 수채화 기법, 끊임없는 새로운 그림에 대한 탐구 이 모든 것을 찬양한다”
1926
클레도 바우하우스를 따라 데사우로 거처를 옮긴다. 바우하우스 학장이었던 그로피우스(Gropius)가 건축한 집에 클리 가족과 칸딘스키 가족이 함께 살았다.
새로 옮겨간 바우하우스에서 클레는 텍스타일 구성과 자유 드로잉 수업을 칸딘스키와 함께 맡는다.
1928
바우하우스의 학장이 그로피우스에서 한스 마이어(Hannes Meyer)로 바뀌면서 더욱 실용주의와 사회참여도가 높아졌고, 클레는 이제 바우하우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혔다. 바우하우스에서 그의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은 클레의 수업엔 항상 학생 이외에 외부에서 온 참여자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클레의 수업을 듣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한다.
1929
경제 대공황이 왔다.
1930
뉴욕 현대미술박물관(Museum of Modern Art, New York)에 유럽 화가 중 처음으로 클레의 단독 전시회가 열린다.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제한이 점점 심해지고 정치적인 문제들로 인해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클레는 뒤셀도프 예술 학교의 요청을 승낙하고 마침내 바우하우스를 사직한다. 바우하우스는 학교의 공산주의 학생들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학장이 강제로 교체되고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 받는다.
1932
취리히에서 열린 피카소의 회고전을 방문한다. 클레는 피카소의 작품들에 강하게 매료되지만 그의 강력한 예술적 존재감을 경계하고, 몇 년간 피카소의 작품을 보는 것을 피한다.
이전까지 주로 작은 크기의 그림을 그렸던 클레였는데, 이 이후부터 화폭의 크기가 대형화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마 피카소의 방대한 작품들이 그를 자극하지 않았나 추측 해본다.
1933
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된다. 즉시 클레가 있던 뒤셀도프 예술학교의 학장이 강제로 사임되고 나치당 공무원으로 바뀐다. 클레의 집이 나치 장교들에 의해 강제로 수색되고, 그가 아내에게 썼던 모든 편지들을 압수당한다. 그의 뒤셀도프 예술학교의 교수권은 정지되고, 바우하우스 또한 경찰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된다. 당시 클레의 미술품 딜러였던 알프레드 프레히트하임(Alfred Flechtheim) 또한 나치에 의해 일을 지속할 수 없도록 압박을 받는다. 클레는 새로운 딜러와 계약을 하기 위해 파리로 간다. 그리고 그 해 12월 클레와 그의 아내는 스위스로 국적을 옮기기 위해 독일을 떠난다.
1934
클레의 가족은 베른에 작은 집을 얻어 생활을 시작한다. 데사우에 있던 집에 비교하면 형편 없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시대였다. 거실을 그의 작업실로 사용하고, 아내와 함께 베른 지역 음악회에 참여하며 생활한다. 클레와 비슷하게 망명하거나 독일에서 추방된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그를 방문했다. 독일을 피해 스위스로 옮겼지만, 당시 스위스의 문화적 풍토는 매우 보수적인 분위기였고 클레의 작품들은 아직 스위스 문화가 이해하기엔 너무나 급진적이었기에 그는 시간을 두고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클레의 첫 런던 전시회가 열렸고, 그에 이어 에딘버러에서도 그의 작품을 선보이게 된다.
1935
예술시장이 매우 침체되고 클레의 생활의 대부분은 과거 저축에 의지하며 살게 될 정도로 소득이 거의 없어진다. 작품을 팔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최근 5년간의 작품만을 모아 드디어 베른에서 첫 전시를 연다. 전시의 카탈로그엔 그를 스위스 예술가로 소개하고 독일에서의 그의 활동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8월 클레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른다.
1936
건강을 조금씩 회복해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몸을 쓰는 것이 많이 어려워져 겨우25점의 작품만을 그려낸다.
1937
치료를 계속하며, 조금씩 그림을 그린다. 이 시기 칸딘스키, 에밀 놀데, 피카소가 그에게 병문안을 온다.
이 당시 16,000점 이상의 모더니스트 예술품이 나치에게 몰수 되는데, 클리의 작품이 140점정도 된다. 이 작품들은 다른 나라 시장에서 팔리거나 아예 폐기되었다.
1938
20세기 독일 예술에 관한 런던 갤러리들의 리서치가 있었고, 여기에 클레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런던 Degenerate Art Exhibition에 전시된다.
1939
스위스에서의 5년간의 생활로 시민권 신청 자격이 주어지고, 시민권을 신청한다. 그의 대해 불건전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경찰의 보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민권 신청은 받아들여진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그에 이어 폴란드까지 점령한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적해 전쟁을 선포한다.
이즈음 클레가 그의 아들에게 한 이야기를 보면 이렇다.
“생산성은 작품을 다양하게 하고 작업 속도를 가속화 시킨다. 그런데 이 중요한 모든 것들이 이제 더 이상 내 안에 없다는 것을 느낀다”
1940
클레의 아버지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클레는 213점의 작품으로 취리히에서 전시를 연다. 건강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 그는 전시 준비에 전혀 참여 할 수 없었고, 전시가 끝나기 직전 아주 짧게 방문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의 건강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로카르노(Locarno)에 있는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강력한 독일 군대는 덴마크,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네덜란드,벨기에, 프랑스를 휩쓴다. 6월 14일 파리도 독일 군대에 무너진다. 6월 29일 파울 클레는 로카르노의 요양원에서 그의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