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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바데 카부드>, 페르시안 블루 돔을 상상하며

김형기 ㅣ 테헤란 | 2014-02-14




무역의 도시로 알려진 '타브리즈'는 중국에서 페르시아를 넘어 콘스탄티노플 즉, 지금의 이스탄불로 향하는 상업의 절대적인 고리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미 BC 714년에 ‘도시’라는 형태를 갖추었으며, 세계 대부분의 성경 고고학자들이 에덴동산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타브리즈는 실크로드를 따라 형성된 상업적 부를 기반으로, 예술과 지식의 보고로 자리매김하면서 수 많은 이슬람 왕조의 예술에 주축이 되었던 장인들을 탄생시켰으며,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두 차례나 점령당할 만큼 이란과 터키 양국 모두에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기점이었다.


 


글 ㅣ 김형기 테헤란 통신원



지진의 상처, 그리고 복원


 


타브리즈는 지질학상의 이유로 200년 주기로 찾아오는 지진으로 인해 역사의 기록을 수 차례 흙더미 속에 묻고 새로운 삶을 그 위에 세우기를 반복해왔다. 570년전, 자헌셔(흑양조 시대, 1380-1468)에 의해 건립된 <곰바데 카부드>역시 1779년 몇 번의 크고 작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비켜갈 순 없었다. 중앙 돔이 내려앉고 건물의 기본 축만 남게 된 이 곳은 56년전 새로운 정부가 건축 재건을 실시할 때까지 이전 정부의 무관심으로 인해 모스크 내부의 왕릉이 도굴되는가 하면, 무너져 내린 건물더미가 인근 주민들의 건축자재로 쓰이는 등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되었다.




복원 당시 입구로 사용되는 이완(Iwan:반구나 궁륭 형태의 천장을 가진 3면이 벽체로 막혀있는 공간) 한 곳을 제외하고외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지금은 타일장식은 제외된 채 벽돌로 그 시대의 기본 형태만을 재현하고 있다. 소박해 보이는 외관, 그러나 이곳은 타브리즈를 수도로 바그다드까지 자신의 세력으로 아울렀던 까비요눌(흑양조) 왕가의 개인 모스크였다.




모스크, 중정이 사라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모스크의 형태는 중정을 둘러쌓고 있는 건물의 형태를 가진 아랍 양식과, 여기에 에이번(Avon)을 더한 이란 양식,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권력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비잔틴 양식인 터키식으로 나뉜다. 물론 이 세 가지의 변형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모스크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이 3가지가 기본 도면이다. 특히 이란의 모스크는 지정학상 위치상 장방형의 중정의이 형태뿐만 아니라 계절적으로 태양이 뜨고 지는 방향에 따라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도면은 양식을 구분하는 형태이상의 역할을 해내는 것도 사실이다. <곰바데 카부드>는 내가 본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보다 작고, 모자이크가 없는 것을 제외한다면내향적인 조건에서, ‘그리스 크로스의 형태의 변형에서 상당히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곰바데 카부드>는 눈이 많은 춥고 긴 겨울을 가진 타브리즈의 날씨 탓에 4개의 에이번을 포함한 중정을 가진 이란 모스크의 특징을 배제하고 내향성이 강한 건물로 건축된, 이란에 미나렛이 없는 두 개의 모스크 중 하나이다. 터키식 모스크처럼 모스크 중앙 공간에 성자의 무덤을 보유한 특징을 갖고 있지만 작은(버블)돔이 중앙돔의 하중을 나눠 같은 터키식 모스크와는 건축상의 차이가 있는 것을 입면도 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건축의 장력과 응력의 원리를 이용한 두 겹의 돔의 형태로 하중을 견디는 이란건축양식의 특징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스크 안에서 공간을 상상하다


상처 입은 입구(portal)를 지나 들어선 모스크 내부에서는 박물관의 도자기처럼 재시공된 건물의 흔적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1957년 이란의 건축학자들과 이탈리아 고 건축 재시공팀은 기존에 남아있는 기록을 따라 그 위에 새로운 건축기록을 덧대는 형식으로 복원을 결정했다. 작업자들은 반복되는 타일이 있던 위치에, 석고에 자연염료로 색을 입혀 기본 패턴만을 보여주는 방법을 선택하고, 장식의 기록이 없는 돔 천장 같은 경우는 동일한 재료인 벽돌을 써서 형태만 복원하는 것으로 모스크를 완성시킨다. 지진으로 유리조각처럼 떨어져나간 타일들은 자리를 찾아주는 것 외엔 복원이 불가능한 것, 오랜 시간 동안 이미 폐허로 남겨진 유적은 조각을 모으더라도 돔이라면 정확하게 어디서 분리된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라는 이유에서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모스크 내부에 사용된 타일장식은 그림을 그려 한번에 가마에서 구워지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색이 최상의 질을 나타낼 수 있는 온도에서 구워내 조각조각이 맞춰지는 방법으로 작업되었다. 예를 들어 타일패턴의 꽃잎의 다섯 개라면 타일 조각도 다섯 개가 하나하나 붙여져 작업되는 방법으로 시공된 것, 이 방법은 지진으로 인해 타일 면 자체가 사각형 판 모양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모스크의 중앙 공간은 왕의 가족들과 관직에 머물렀던 이들이 연례행사처럼 사용된 것으로 다른 모스크와 달리 단 하나의 입구가 바로 수직으로 중앙돔에 연결되는 특이한 구조를 띈다. 모스크는 중앙돔과 그 돔의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나뉜 양쪽의 기도실, 그리고 자헌셔의 부부가 있는 무덤이 있는 동쪽 공간으로 나뉘는 이곳은 무덤의 공간과 중앙돔은 나무로 짜여진 격자창(이슬람 패턴으로 만들어져 공기와 빛이 통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대나무 발’과 같은 ‘역할’을 함)으로 분리와 연결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이 동쪽 공간은 천장을 둘러쌓고 있는 화려한 장식은 물론 공간으로 진입하는 복도의 형태로 보아 무덤으로 사용되기 이전, 왕의 개인 기도실로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페르시안 블루 타일, 금물로 그려진 장식
 


아제리어(터키어)로 푸른 색을 나타내는 카부드라는 명칭이 더해진 이 모스크는 건립 당시 에머라트 모자파리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왕의 개인 모스크로 완공된 후, 사람들의 입소문에 의해 전해지면서 이름마저 바뀌게 된 이유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타일 장식이 이 모스크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왕이 사후에 무덤으로 사용되었던 이 곳은 진입로로 쓰이는 대칭형의 복도와 돔이 올라가면서 만들어진 4개의 손바닥만한 개구부, 동쪽을 향한 정면의 작은 창이 전부이다. 아치형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빛나는 타일 벽체에 둘러 쌓인 이 곳은, 기도하는 이에겐 시간의 흐름 조차 알 수 없는 속세와 단절된, 자신만이 존재했던 공간이었음이 분명하다.



<곰바데 카부드>는 지진 속에 쓸려갔을 모스크를 생각한다면야 남아있는 것들이 고마울 따름이지만, 온전했던 모스크를 상상한다면 아쉬운 마음이 더 큰 장소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도 타브리즈의 수많은 유적을 제치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상징처럼 남아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최고의 모뉴멘트이기도 하다. 중동에서 가장 큰 바자르가 존재하는 곳, 낙타를 타고 눈 덮인 길을 따라 이스탄불로 향하는 상인들에게, <곰바데 카부드>는 신의 상징으로 그리고 그들의 보호자의 모습으로 그들을 지켜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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