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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한국 자동차 업체 3사의 수출 전략

2011-08-08


석유위기 이후, 전세계적으로 불었던 소형차 추세에서 한국의 자동차 기업들은 미국시장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미국시장의 소형차 공급 부족 상태를 맞아 1980년대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미국시장으로의 진출을 통해 대량 생산체제와 차량의 개발능력을 확보함으로써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글 |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현대자동차의 수출 전략


현대자동차의 성장 요인은 독과점 체제를 유도하는 정부의 정책과 미쓰비시와의 기술제휴관계, 독자적인 기업전략으로 개발한 고유모델이 규모의 경제에 도달하고 국제경제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에 있었다. 특히 미쓰비시의 기술 공여는 현대가 독자적으로 완성차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인 발판이 되어 주었으며, 미국 시장의 판로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현대가 미쓰비시자동차와 제휴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쓰비시도 미국 크라이슬러에 기술적으로 의존하던 신생업체였기 때문이었다. 미쓰비시자동차의 모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은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가미카제(神風) 전투기의 엔진을 제작, 납품했던 우수한 기계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기 생산에 참여한 전력으로 종전 후 미 점령군 통제 하에 견제를 받으면서 자동차 부문에 진입이 늦어져, 1970년에 이르러서야 미쓰시비 자동차가 설립될 수 있었다. 미쓰비시는 고유의 기술력과 크라이슬러와의 협력관계를 통해 자동차개발에 전력을 기울여 80년대 이후에 들어 갤랑과 랜서, 파제로를 개발했고, 이 차량들이 세계 각처의 랠리에서 우승하면서 독자적인 개발능력과 그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신생업체로서 독자적인 성장에 전력을 기울이던 미쓰비시는 현대에 구형 기술을 이전하였고, 현대는 미쓰비시와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동차 생산 기술을 이전받아 기술력을 확보했다. 이러한 기술지원 관계는 미국시장에서 현대가 자체적인 개발력이 부족한 업체라는 혹평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일본제 엔진을 단 차’라며 성능에 대해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는 이점이 되기도 했다.

미쓰비시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포니를 개발하고 유럽과 중동, 중남미 등으로 소량 수출하며 세계 시장 진출의 기회를 엿보던 현대는 1980년대 본격적으로 북미 수출을 겨냥한 수출전략차량의 개발에 들어갔다. 1981년 발표되어 일명 “X카”로 불린 이 계획은 연간 3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설립 계획을 담고 있었다. 이 계획이 발표되자 시장은 현실성 없는 계획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이 계획을 발표한 81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있는 자동차는 모두 합쳐도 57만대에 불과했고, 이 중 승용차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6만대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의 발표는 국내에 있는 모든 승용차 대수에 해당하는 자동차를 단 1년에 만들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다. 게다가 오일쇼크와 극도로 악화된 불경기로 국내 판매가 매우 부진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에 대한 불신은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30만대 공장 설립 계획은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동차를 대량 수출해야만 한다는 난제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망상이라 여기던 이 계획은 현대가 미쓰비시와의 기술협력과 자본합작을 추진하고 엑셀의 개발과 생산 공장을 건립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현대자동차는 엑셀의 미국 수출을 계획하면서 먼저 캐나다에 포니II(84년)와 스텔라(85년 1.600cc)를 경쟁차의 70-80% 수준의 가격으로 수출하였다. 캐나다는 미국 시장의 1/10정도 규모이면서 시장특성도 유사해 미국진출을 위한 시장조사와 수출 기반을 위한 사전준비를 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캐나다 진출은 성공적이었으며, 이곳에서의 경험은 곧 대미진출의 전략적 발판이 되었다. 85년 9월 2일자 교통신문의 기사 “일본인이 본 한국차 신화”에서는 ‘후륜구동의 포니엑셀이 전륜구동의 최신기술을 투입한 미쓰비시의 미라쥬보다 잘 팔린 원인’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 “포니엑셀은 동급의 일본차보다 1천 캐나다 달러 정도 가격이 저렴했고, 기술적으로도 성능이 준수했다. 저가격시장의 공백을 효과적으로 공략한 점과 일본차와 비슷한 외관과 광고전략, 그리고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수리가 용이했다는 점에서 직접 수리하기를 좋아하는 캐나다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쓰고 있다. 이 기사가 말해주듯이 현대자동차의 캐나다 진출은 일본차에 대한 신뢰를 뒷받침으로 경쟁차보다 저렴한 가격에 주요점을 두고 있었다. 이같은 저가 정책은 미국진출에도 이어졌고, 86년 엑셀이 미국에 상륙했을 당시 현지 광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엑셀은 해치백과 세단형의 다양한 모델과 저렴한 가격으로 미국 시장에 진입했다. 기본형은 4,995달러로 이시기에 미국에서 오천달러 이하로 살 수 있는 차는 거의 없었다. 풀옵션을 달아도 7천달러 수준으로 이 가격은 토요타나 닛산 소형차의 기본 모델 가격에 불과했다. 이 광고가 말하듯이 엑셀은‘중고차 가격에 살 수 있는 새 차’였으며, 소득이 낮은 계층을 중심으로 소비되면서 현대차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현대의 이와 같은 저가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81년 실시된 일본차에 대한 대미수출자율규제로 인해 미국 내 저가시장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경쟁력에서 앞선 일본의 소형차들이 미국시장을 과점하자 미국이 일본정부에 자율적으로 수출대수를 규제하도록 요청한 것이었다. 일본업체는 대미자동차수출이 연간 230만대로 제한되어 시장의 양적 성장이 어려워지자, 한정된 물량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실현하기 위해 고가화 전략을 취했다. 수출차종을 중대형급 또는 고급 옵션형으로 바꾸어 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차와 정면으로 경쟁하지 않는 저가격 시장이 생겨났고, 현대는 이 틈새시장에 엑셀을 공급하면서 판매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86년 미국진출 첫해에 18만6천대를 수출하고 87년에는 26만대 수출을 이루어내는 놀라운 성공을 거둔 것이다. 물론 현대가 이러한 저렴한 가격으로 엑셀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당 생산비가 낮았기 때문이었다. 생산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임금은 일본의 1/4, 미국의 1/10에 불과한 수준이었고, 낮은 임금에 비해 그간의 경험과 기술개발로 생산기술이 고도로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엑셀은 판매 가격에 비해 일정한 품질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약적인 판매를 기록하던 엑셀은 89년 초부터 그 성장세가 주춤해졌다. 미국시장이 침체하면서 승용차 수요가 감소하고, 일본차의 현지생산이 늘어나 저가소형차 시장을 잠식해 나가면서 판매량이 대폭 줄어든 것이었다. 자동차의 공급이 넘쳐난 상태에서 일본차와 정면으로 경쟁하게 된 한국차는 가격경쟁력이 약화되고 품질에 대한 소비자 불만 등의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쳤다. 87년부터 극심한 노사분규가 일어나면서 생산성이 떨어졌고 임금도 올랐으며, 원화절상 등으로 가격경쟁력이 이전보다 낮아졌다. 운행한 지 2년이 지나면 부품의 내구력 부족으로 잦은 고장이 생기는 것과, 낮은 중고차 가격도 불만의 요인이 되었다. 또한 제품이 흑인이나 히스패닉계를 중심으로 소비되면서 저가 이미지가 형성되어 백인들이 꺼리는 차종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차는 기술적으로 구형모델이었고 제품수명이 단축되는 추세 속에서 신제품 개발의 요구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러한 요인으로 현대는 미국수출에 큰 타격을 입었다.

현대자동차는 미국수출량의 감소분을 수출지역을 다변화하는 적극적인 판로 확보 노력으로 대처했다. 또한 이 시기 국내 수요가 급증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수출다변화 지역은 대부분 국민소득이 낮아 신뢰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저렴한 가격의 차량을 구입하는 국가가 중심이 되었다. 현대자동차의 수출지역 다변화 정책을 두고 일부에서는 “화전(火田)방식의 수출”이라고 비꼬아 표현하기도 하였다. 화전이란 산골짜기에서 농사를 지을 자리에 불을 질러 토양을 기름지게 하여 몇 년간 사용한 후에 토양이 척박해지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같은 방식으로 화전을 일구는 농사법이다. 엑셀이 사용한 지 2년쯤 지나 잦은 고장으로 미국 판매가 급격히 감소하게 되자, 유럽과 동유럽의 미개척시장에 진출해 가는 전략이 마치 화전을 새로 개간하고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한 말이었다. 화전방식은 가격경쟁력과 질적 경쟁력이 부족하여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수출하지 못하게 되면서, 여러 지역을 개척하는 형태를 일컬으며, 자동차의 품질이 세계적인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열악했던 당시의 수준을 나타냈다. 또한 품질이 부족할지라도 수출량을 늘려 양적 성장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당시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러한 품질수준은 현대자동차만이 아닌 당시 한국자동차 전반의 문제였다.

세계 시장에서 고전하며 판매처 확보에 집중하던 80년대 후반, 국내에서도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동차 대중화가 국내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이는 80년대 고도성장으로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소득계층이 늘어난 원인도 있지만, 수출부진을 국내 판매로 충당하려는 기업의 판매 전략과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영향을 미쳤다. 현대자동차는 이처럼 여러 난관을 극복해가며 차종을 다양화하고 설비를 확장했다. 68년 2만대 수준의 첫 포니공장에서 출발한 울산의 생산능력은 85년 엑셀공장이 건설되면서 45만대로 늘어났고, 90년에는 100만대를 넘어서게 되었다. 현대자동차의 이러한 성장은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독자적인 기업전략의 추진과 고유모델 개발, 부품국산화, 효율적인 판매전략 등을 통해 국제경제력을 갖추면서 이룩되었다.

요컨데 현대자동차의 고유모델 승용차의 대량수출은 한국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 되었으며 일본차의 공급이 한시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저임금과 규모의 경제를 통해 획득된 강력한 가격경쟁력과 일정수준으로 확보된 품질경쟁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대우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수출전략


현대자동차가 엑셀을 개발하여 미국수출에 성공한 반면, 대우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미국업체의 월드카 계획에 참여하여 해외 생산 기지로서 미국 진출에 가세했다. 미국업체는 석유위기 이후, 소형차 시장이 전체 수요의 50% 이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세에 대응하지 못하여 서독과 일본의 수입차가 소형차 시장을 잠식하면서 심각한 경영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들은 소형차를 직접 생산하지는 않더라도 소형화에 대응할 만한 조치를 취해야 했는데, 이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수립한 것이 월드카 전략이었다. 월드카 전략은 경쟁력 있는 소형차를 신흥공업국의 제휴업체나 해외자회사에서 생산하여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해외생산거점에서 주요 부품을 생산 공급하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조성하고 전세계에 공급함으로써 디자인과 개발 비용을 줄여 일본차에 대응하는 방안의 일환에서 이들은 한국업체와 제휴를 맺게 되었다.

르망은 GM의 월드카 계획에 의해 84년 대우자동차에서 출시된 차량이었다. 수출산업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오던 대우는 GM과 제휴하여 소형차의 해외조달기지로서 국제 분업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GM이 최종적인 품질보증을 하며, 오펠이 엔지니어링을 담당하고 대우가 생산하는 월드카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국내 판매명으로 ‘르망’이라 불린 이 차는 GM의 독일 자회사인 오펠이 수출전략차종으로 개발한 ‘카데트’였다. 대우는 86년부터 OEM(주문자생산방식)으로 르망을 생산하여 미국시장에 지엠 폰티악의 판매망을 통해 수출했다. 르망 공장의 준공으로 대우자동차는 87년 승용차 23만대와 상용차 7만대를 합해 총 30만대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기아자동차는 81년 정부의 중화학투자조정조치로 승용차 생산 금지 조치를 받았지만, 포드, 마쓰다와 3국간 분업체제를 진행하며 프라이드의 생산을 준비해 왔다. 마쓰다는 80년대 초부터 포드와의 국제 분업 관계 속에서 신흥공업국을 통해 우회적으로 대미수출을 추진하였고, 85년부터는 미국 현지 생산 공장의 설립을 착수하여 장기적으로 포드의 소형차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일본차에 대한 대미수출자율 규제가 지속되어 마쓰다로부터 소형차를 직접 수입하는 것이 제약되면서, 포드는 소형차를 마쓰다의 미국 현지 생산 공장으로부터 조달하는 한편, 부족분을 기아에서 OEM 방식으로 조달하였다.‘메이플’프로젝트라고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마쓰다의 주도 아래 차량을 설계하고 포드는 최종 판매하며 기아가 생산하는 분업체제였다. 87년에 승용차 중단이 해제되자 프라이드(수출명은 페스티바)를 생산한 기아는 87년부터 미국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기아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포드는 소형차 라인을 갖추었다는 것에 그쳐 미국시장에서의 판매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또한 페스티바는 마쓰다와 포드의 양국에 지불하는 로열티로 이익이 크게 남지도 않았다. 그렇더라도 프라이드의 생산으로 기아의 총 생산능력은 30만대 규모로 늘어났고 90년에는 50만대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자동차 산업의 흐름 속에서 한미일간의 국제 분업 관계를 통해 생산된 르망과 프라이드는 해외업체의 첨단 기술을 흡수하고 품질을 국제수준으로 높이는 전기가 되었으며 생산 능력의 확대에 기여하였다.

1980년대 세계적인 자동차산업 환경은 미국과 일본의 경쟁으로 좁혀지면서 자동차의 생산 방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디자인과 개발비용을 줄이고 규모를 더 키우기 위해 회사간 협력 체제를 구성하고 분업관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생산방식을 통해 여러 나라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똑같은 차가 생산되었으며 현지 조건을 이용한 현지공장의 설립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한국의 자동차업체는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생산체제를 확대하고 기술적인 품질 향상을 기할 수 있었으며, 국내의 자동차 대중화를 이끌었다.




* 참고 문헌

강명한,『한국차, 브레이크가 걸렸다』, 정우사, 1998
구상,『자동차이야기』, 조형교육, 1999
유명,『국산차 정말 나쁜가』, 문화산책, 1995
정세영,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행림출판, 2000
조형제,『한국 자동차 산업의 전략적 선택』, 백산서당, 1993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한국자동차산업50년사』, 2005, p243
마에다 다카노리, 박일근역,『미래산업을 주도하는 세계자동차 전쟁』, 시아출판사, 2004
김재만 전 기아자동차부사장 과의 인터뷰, 2009.10.27
「교통신문」 198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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