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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인생의 낙오자, 삶의 승자 빈센트 반 고흐 ②

2011-01-18


프랑스 혁명이라는 노동자의 대혁명을 숙주로 삼아 자랐던 아카데미 양식의 회화가 오히려 장엄한 양식을 띄우는 반면에, 그에 대한 반동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노동자의 묘사였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지만 적어도 이해할 수 없는 괴사까지는 아니다. 1800년대 프랑스 화단을 휘어잡고 있던 아카데미 양식의 기원은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주의로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의 삼대 거장중 한 명인 라파엘로에게까지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에서는 오히려 노동자에 대한 묘사나 형태의 내면적인 묘사에 따른 기형적 변형은 기피해야 할 사항이었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그것을 그리는 것은 통속적인 풍속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저질품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따라서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한 바르비종의 사회주의 화가들이 농민과 노동자를 즐겨 그렸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흐가 밀레를 만난 것은 이미 밀레가 죽은 다음으로, 그의 그림을 통해서였지만 이 자연주의의 위대한 거장은 마치 루벤스가 플랜더스의 네로를 사로잡았듯 단 한 방에 고흐를 사로잡았다.

고흐는 밀레의 작품에 대한 수많은 모사를 통해 미친 듯이 노동자와 농민을 그려나갔지만, 그 중에서 밀레의 작품과 동일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거의 모든 작품은 고흐만의 느낌으로, 밀레의 작품에서 고흐가 느낄 수 있었던 무언가를 묘사해 나간 거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자, 입장을 바꿔보자. 전설적인 댄스그룹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뭔가 심상찮은 듣보잡의 느낌이 추가된 중국제 짝퉁. 장사가 될 것 같은가? 당연히 팔릴 리가 없다. 고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열심히 배를 곯았다. 밀레의 그림과 고흐의 그림이 어떻게 달랐을까. 그건 직접 비교해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다.

보이는가? 이런 그림이 꽤 된다. 고흐는 배를 곯았지만, 존경하는 선배화가에 대한 오마쥬이자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손을 쉬지 않았다. 사회주의자에 걸맞게 노동을 신성시했고, 스스로도 노동하는 노동자이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 최선을 다했다. 격렬한 터치를 이용해 온 몸을 던져 그림을 그렸고, 한번 작품을 완성시키고 나면 삭신이 쑤셔 비틀대며 침대 위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가 배를 곯을 수록 오기는 불타올랐지만, 그 역시 한 명의 순진한 남자였을 뿐이다. 정신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사랑에 몇 번 실패하고 나니 회의를 지울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자신의 할 일을 질문하고, 불분명한 미래에 좌절하면서도 손을 접지 못해 온 몸을 던졌다. 이 와중에 폴 고갱을 만나 작가 공동체. 즉 소규모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얻어낸 거다.

고흐의 유토피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갱과의 꿈에서 힌트를 얻어 마련했던 작가 공동체를 위한 공동화실, 방 네 칸짜리의 저 유명한 노란집은 결국 2차대전의 와중에 폭격을 맞아 박살 나면서 고흐의 이상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다가오지 않는 꿈의 실현에 좌절하면서 고갱과의 인간적인 성격차로 말미암아 불화가 생기자 결국 고흐의 우울증은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고흐보다 5세 연상이었던 폴 고갱은 35세 이전엔 파리의 증권맨으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월가의 펀드매니저 출신이었던 사람이었다. 고흐와는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특히 예술을 대하는 자세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인상주의와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려는 젊은 화가들의 리더었던 고갱은 필연적으로 언더그라운드의 우상이었던 밀레를 경멸하는 대신, 기교파로서 명성을 날렸던 앵그르와 드가를 좋아했다. 순간의 인상을 기억한 후 구상을 통해 그림을 작성해 나가는 고갱은 구상이라는 일종의 설계작업을 통해 순간의 감성을 자기 식으로 한 차례 걸러냄으로써 사물을 보다 충실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거라고 믿었지만, 순간의 인상이야말로 원시적 감성 그 자체라고 여겼던 고흐는 그것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철저하게 반박했다.

물론 반박에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한 증거를 대기 위해 고흐는 자신의 작품 속에 일본 우키요에에서나 볼 수 있는 화사한 원색과 눈에 띄는 강렬한 터치 빈도를 대폭 늘렸고, 미묘한 형태의 변형마저 진행시키다가 대기 중의 미세한 먼지 움직임에까지 자아를 담아 바라보기 시작했던 거다.

이미 그것은 그냥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그것은 내면을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가 되어 있었다. 고흐가 보기에 세상 모든 것은 연동되어 움직이며, 어느 것 하나 따로 노는 것이 없다. 흐름을 따르지 않는 몇몇 요소들은 이 거대한 에너지의 격류 속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서 있을 따름이지만, 그것이 영향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그는 기다려야 했다.

예정되었던 파국은 닥쳐왔다. 작가들의 사회적인 공동체 구성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버린 순간, 고흐가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있던 신념에 직격탄이 가해진 거다. 사실 사회주의자들의 신념은 어느 정도는 공산주의자들의 이상에 맞닿아 있는 것이 사실이었고,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던 여러 약점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아집을 물리적으로 억누르려 들었다는 것에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단합하여 부르조아를 타도하는 순간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새로운 부르조아가 등장할 수 밖에 없다는 이 섬뜩한 사실은 뭘 어쩌던 간에 노동자들이 모이는 순간 이익계급이 태동할 수 밖에 없다는 또 다른 진실을 낳았다. 평생의 이상으로 간직하고 있던 개인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좌절은 이렇게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훨씬 이전에 이미 한 위대한 화가의 정신에 치명타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던 자신과 같은 작가들이 공동체 건립을 거부했다? 고흐는 믿을 수 없었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바라보던 세상이 무너진 것을 느낀 순간, 고흐는 자신과 세상의 강제적 격리를 경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고갱이 목숨의 위협을 느껴 아를의 노란집을 뛰쳐나간 순간 비극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 되었다. 자신이 느낀 바대로 세상을 묘사하던 고흐로서는 세상은 자신의 내면에 작용하는 거울이었고, 자신은 세상의 모습이어야 했다. 그런데 필사적으로 사수하며 지켜나가던 그 공식이 자의에 의해서도 아니고 타의에 의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인 부상을 당한 고흐의 우울증은 제동장치가 망가진 기관차처럼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냥 좀 우울하고 말지...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짝 말해 주자면, 이 우울증이란 것은 바로 감성의 면역결핍증이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감성을 보호하고 있던 모든 내면적 장치들이 한 순간에 홀랑 벗겨져 버려 사소한 일에도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고, 마찬가지로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다. 심해지면 우울증 환자의 뇌는 극심한 외부적 정보의 입력에 포화상태를 일으켜 기억상실증이 오기도 하고, 더 심해지면 증폭된 감정에 자극 받아 자기자신에게 불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증오하게 되어 버린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른 후 길가의 매춘부에게 건네주고, 자기 발로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왜 거길 자기 발로 들어갔을까. 어떻게든 그는 원치 않았던 그 상황을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고 스스로의 병을 고쳐 영혼의 안식을 취하고 싶었던 거다.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그가 그렸던 그림은 대개 자연주의 화가들의 정석인 풍경화였지만, 헐벗겨진 감성에 휘몰아치는 내면의 폭풍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흐는 격침 직전에까지 몰린 자신의 감성에 부딪치며 돌아가는 그 모든 것들을 똑똑히, 그리고 아주 철저히 묘사해 냈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것들을 아주 똑똑하게 관찰하려 애썼던 거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이 절대로 자신의 존재 없이는 볼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자신을 찾아 중심을 잡아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다. 자살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지만, 때때로 드는 감성의 지나친 자극, 즉 우울증과 싸우느라 그의 감성은 지칠 대로 지쳐갔다.

그는 그때마다 오른손보다 그 표현력에서 훨씬 저능한 왼손으로도 작품을 그려보는 등 새로운 시도를 통해 숨어있는 자신을 끌어내려 안달했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사랑했던 모습을 회피하는 이상 뚜렷한 답변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이성은 의지의 지배를 받고, 의지는 감성이 지배한다.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의지는 감성에 비하면 허약한 존재. 무너져 내린 자아와 헐벗겨질 대로 헐벗겨져 극도로 예민해진 감성은 결국 고흐에게 있어 저주가 되었다.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증폭된 감동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자아의 표현인 작품에서는 이미 망가진 자아 때문에 그것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리고 그려도 자기 그림이 아닌 것 같은 낯섦을 만나는 속에서, 그는 그 저주받을 낯섦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그리고 마치 광인처럼 그림을 그리며 원색의 붓을 휘둘러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게 잘 될 턱이 없다.

자아가 망가진 반 고흐는 붓을 놓고 일단 자아를 먼저 찾은 후 다시 그림을 시작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는 무슨 그림을 어떻게 그린다 한들 절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족할 수 없는 그림에 좌절하며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마약중독과 비슷하며, 그 종말은 결국 파국 밖에 없기 마련. 어느 여름날, 완전히 좌절해 버린 사내는 벌판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스스로의 가슴에 총알을 쏘아 박았다.

빈센트 빌렘 반 고흐. 빈센트라는 이름은 라틴어 빈센티누스에서 왔으며, 어원을 따져 올라가면 승리자를 뜻하는 이름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인생에서 패배한 자로, 백혈구가 적혈구를 공격하는 백혈병에 걸린 것처럼 스스로의 불타는 감성이 자신의 빈약한 의지를 공격하여 쓰러뜨려진 자였다.

그러나 예술가는 죽어도 예술은 남아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 비록 그가 바라는 이상향은 오지 못했고, 그가 바라던 노란집의 꿈은 폭격으로 박살 나 무너졌지만, 적어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어 보는 공동의 가치를 죽는 날까지 바라보았던 그의 그림은 인상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인류의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까지 그는 인상파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광폭한 터치의 분출로 말미암아 야수파의 활동에도 깊은 감명을 끼쳐버린 예술가로 남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여 투쟁했던, 그저 재능이 뛰어났을 뿐인 일개 인간이라는 데에 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사력을 다했고, 배신과 가난, 실연의 좌절 속에서도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광하듯이 그림을 그려내었다. 만년작으로 이동할 수록 흐름이 격해지며 원숙해 지는 화사한 색상과 격렬한 터치는 그가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애착이자 신념의 끈 그 자체였다. 문제는 강한 긍정일 수록 오히려 부정이라는 명제에 있다. 허세 섞인 터치와 허풍 섞인 색상이 강렬할 수록 오히려 그의 끈은 얇아져만 갔고, 종내 마지막 줄을 놓치고 더 이상의 동력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방아쇠를 당길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고독하진 않았을 망정 외로운 자였던 빈센트 반 고흐는 이렇게 채 마흔도 되기 전에 우리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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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잡지디자이너 과심은 여러분야에 관심은 많으나 노력은 부족함 디자인계에 정보를 알고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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