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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의 종이 밖 여행

2009-03-03

ㅎ. ㅎㅎㅎ? 저 ㅎ은 분명 웃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ㅎ은 어느새 글자가 아닌 웃음의 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음이다. 소리 내어 읽어볼까. 애매한 발음으로 “ㅎ”라고 소리내는 것이 아닌, “히읗”이라고 또박또박. 한글디자이너이자, 활자공간의 이용제 대표가 만든 타이포그래피 공간, 갤러리&카페 ㅎ(히읗)이다.

에디터 | 김유진(egkim@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공간에 들어서며 ‘ㅎ’을 ‘히읗’으로 소리 내어 읽어본다. 이렇게 자음을 읽을 때가 아니면 딱히 사용하지 않는 ‘읗’이라는 글자처럼, 알고 있었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것과의 생경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멀티하게 진화된 여느 카페처럼 갤러리이자, 바, 세미나룸, 숍 등의 역할을 두루 해내는 ㅎ에서 가장 즐거운 경험은 종이를 떠나 이 공간 안으로 떠다니는 타이포그래피와 조우하는 일이다.

공간의 기본적인 테마는 글꼴의 미디어를 여러 채널로 가져가기. 글꼴이 주로 존재해왔던 방식 즉 종이에 프린트되어 보여지는 것이 아닌, 목재의 오브제에, 커튼 위 영상으로, 공간 바닥에 현현되는 타이포그래피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공간 ㅎ의 프리즘을 타고 이루어진다.
공간이 문을 연 11월에 시작한 ㅎ의 첫번째 전시 <삶과 타이포그래피> 에서는 이용제를 비롯 김상도, 김종건, 문장현, 박우혁, 진달래, 슬기와 민 등 15명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했다. 시각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일상 속의 예술로서, 삶의 표현으로서 타이포그래피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디자이너 15명의 작업은 창문, 벽, 계단, 화장실 등 생활 공간으로 깊숙이 녹아 들었다. 지난 전시의 흔적은 아직도 그 공간에 존재한다. 다음 전시가 방해 받지않는 범위 내에서 기존의 작업들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 ㅎ의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그래서 두번째 전시가 시작된 1월에도 지난 전시 작업들이 공간 ㅎ 안의 일상적인 동선과 교차된다. 테라스 유리에 직접 작업한 스트라이크 디자인 김장우 실장의 작업 ‘히읗’은 노랑과 빨강의 경쾌한 배합 만큼이나 흥미로운 직선과 동그라미의 ‘ㅎㅣㅇㅡㅎ’을 조형적으로 풀어냈고, 필묵 김종건 대표의 ‘꽃’ 글씨는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겨울 테라스에서 한 폭의 병풍처럼 존재한다. 화장실 바닥의 스텐실은 김상도의 작업이다. 여자 화장실에 ‘앉아’ 바닥을 내려보다가 “낀 것처럼”이라는 글자를 읽고야 말았는데, 민망함을 무릎 쓰고 반대편 남자화장실의 문을 빼꼼 열어 훔쳐보니 바닥에 “설마 했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1월부터 시작된 두번째 전시 노승관의 <히읗을 채우다> 는 독특하게도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5시경부터 ‘보여졌다’. 자음과 모음, 행과 열이 이동하면서 글자가 공간의 내부를 가득 채우는 영상 속에 만나고 사라진다.
종이에서 뛰쳐나왔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글자들의 이동과 분리와 결합이 초성, 중성, 종성으로 형성되는 한글 조합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반영하며 유리벽 사이로, 불투명한 커튼 위로 흐르고 흐른다. 작가와의 작은 좌담회까지 마련하는 ㅎ의 전시는 공간을 갤러리에서 작은 담론들이 오가는 장소로 또 한번 확장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의 전시가 가능한 데에는 인테리어 몫도 컸다. 타이포그래피를 위한 공간, 한글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용제는 건축가 김대균에게 공간을 의뢰하면서 “자금은 넉넉치 않다, 다만 환경적인 건물이었으면 좋겠다”는 두 가지 주문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합의점은 저렴하고 간단한 경량 철골 구조를 이용한 ‘경량 건축’이었다.
리모델링이 불가능한 주택을 모두 헐고, 외관은 강화유리로, 내부는 기둥 12개로 건물 상판을 받쳤다. 다른 건물들의 단열 구조와 달리 철판과 단열재 사이의 공백을 없앤 대신 유리로만 되어있는 공간의 열 보온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단열재 자체만을 여러 겹 사용한 높은 천장이 유독 도드라진다.

타이포그래피와 한글 전시를 위한 공간을 고려했음에도 사방에 벽 하나 없다는 사실은 ㅎ의 전시가 어떤 형식을 표방하는지 짐작케 한다. “대학 졸업 직후부터 전시에 재미를 느껴 적게는 1년에 2~3회, 많게는 5~6회까지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우후죽순 늘어나는 전시, 일상화되고 관성화된 전시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지 못했다”는 말에서 전시에 대한 이용제의 고민이 드러난다.
갤러리의 흰 벽 액자 속에서 우아하고, 고상하게 들어가 있지 않은 작업들, 공간에 녹아 들어간 작업이야말로 디자인이 추구하는 삶 속의 타이포그래피가 아닌가. 하긴 종이에서 일탈을 시도한 글꼴들이 흰 벽 액자 속에 무기력하게 봉인된다면 아쉬울 일이다. 오히려 이 독특한 공간이 창작자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크리에이티브한 자극을 주는지 확인하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한글은 한글, 포스터는 포스터, 연구는 연구, 작품은 작품… 각각을 개별적인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이용제는 이제 글자에 대한 생각, 디자인에 대한 생각, 작품에 대한 생각이 창작자로서 작업의 대상을 어떻게 다룰 수 있고, 또 어떻게 확대시키거나 재생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공간 ㅎ의 존재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꼭 한글이나 타이포그래피가 아니라, ‘한글적’이거나 ‘타이포그래피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작업이면 어떤 것이든 좋다. 이를테면 초성, 중성, 종성의 결합처럼 이야기의 흐름이 결합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형식의 CF도 ‘한글적’인 작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이치에서 만들어진 한글의 태생을 고려해 환경적인 부분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는 디자인도 환영한다. 그 첫번째는 안소영의 ‘구운 종이컵’에 담길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티셔츠나 텀블러 같은 상품도 디자이너와 연결시켜 공간에서 판매할 계획이다. 디자이너가 제작한 책들의 대안적인 유통 경로도 이 공간을 통해 모색하려고 한다.

문인과 화가, 음악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여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또 호기롭게 예술선언을 하기도 하는 20세기 초 유럽의 살롱과 같은 공간. ㅎ에 대해 이용제가 바라는 건, 이처럼 타이포그래피나 한글이 좋은 방향으로 팽창하는데 제 역할을 하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문득 다다이즘을 태동시켰던 취리히의 캬바레 볼테르가 떠오른다. “예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그리고 예술의 의미와 형식에 대해 반발했지만, 예술에 관한 끊임없는 고민을 했던 사람들. 무의미하게 읊조리는 ‘다다’의 어감이 어딘가 모르게 ㅎ과 닮아있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여기서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새로운 선언이 생겨날 지도 모른다. 예술을 사랑했던, 디자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낭만적인 공간, 이곳이 21세기 서울의 공간 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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