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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동두천, 매향리, 통일촌 그리고 승전탑까지

2011-10-07


구술 | 강용석
정리, 사진 | 이상엽


‘동두천 기념사진‘에 대해 : 27년 만에 첫 단독전시를 연다.

1984년, 대학 졸업 작품으로 찍은 것이 한국전쟁과 미군에 관한 것이다. 82년 겨울부터 83년까지 흑백으로 이태원의 미군부대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곳은 시내에 접해 있어 사진이 현대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동두천으로 갔다. 미군과 농촌, 미군의 점령지로서의 상징성이 강했다.

동두천은 교통도 좋지 않았고 너무 멀었다. 처음엔 거리에서 사진을 찍다가 술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그곳은 함부로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 술집 저 술집이 다 비슷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백인동네와 흑인동네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문 사진사가 있었다. 동네 사진관과는 상관없이 사진사들이 홀에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흑인동네 사진사 아저씨가 건강이 좋지 않아 홀을 돌 수 없게 되자, 내게 그 일을 넘겼다. 그래서 짐을 싸 보산리(지금은 보산동)로 들어갔다. 방은 한 달에 3만원. 혼자 살림을 하며 밤에는 홀에 나가 사진사로 일하며 1년을 보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사진연구’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다. 번역과 비평을 다루는 학회지를 1년에 한번씩 발행하기도 했다. 어쩌면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과 참여운동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근현대사의 재해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민주화와 외세에 대한 기존의 시각에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 싶었다. 체계적이지는 않았어도 열정을 갖고 있었다. 80년대 초반, 당시는 대체적으로 진보적 관점이 풍미했다. 권태균, 정동석, 김영수 등의 사진가들이 사회적인 사진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고, 지도교수였던 한정식선생도 나의 작업을 격려만할 뿐이었다.

1년간 보산리에서 살았다. 그리고 미군클럽을 돌며 사진사 노릇을 했다. 하지만 작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미군부대에서 사진사 한다는 소문은 힘들었다. 뭔가 구심점을 갖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했고 흑석동을 오갔다. 학교가 안성으로 내려가면서 약 1년 동안의 ‘동두천 기념사진’작업이 마무리됐다.

나는 당시 왜 이 사진들을 찍었을까 생각해본다. 모호했다. 전시를 한다거나 책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것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처음 이태원에서 하던 흑백작업과 달리 동두천에서는 컬러로 작업한 것은 당시 미군부대 앞 사진관에 걸린 사진의 스타일을 따른 것이다. 술집에서 찍는 사진은 당사자들에게 그저 재미나 유희로 찍는 사진들이었다. 사실 고급한 스타일을 적용하려 했지만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사진이 역사적인 무게가 실린 상징화된 이미지였다.

한정식선생이 주도했던 학술지 ‘밝은방’ 87년도 판에 이 작업 ‘동두천 기념사진’이 발표되어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 나 역시도 그렇게 피드백이 클지는 몰랐다. 그리고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기획전에 몇 점을 건 적이 있지만 단독 개인전을 연 적은 없었다. 이번 5월, 우연한 기회에 몇몇 사진가들과 전시를 하게 됐는데 이 ‘동두천 기념사진’을 다시 정리해서 건다. 작업한 지 27년만이다. 처음 흑백으로 이태원의 풍경과 인물을 찍은 이래로 미군의 포트레이트 작업, 동두천 클럽 안의 기념사진까지 청년기에 가장 정열을 다한 ‘미군’ 작업이었던 것 같다. 작업을 하면서 두려움도 있었지만 생계와 작업이 하나로 이어진 결과물이었다. 하루 한 롤씩 총 300롤 정도 찍은 것 같다.


새로운 전시에 대해 : 네 번째 한국전과 관련된 작업이라고 들었다.

올해 말에 한미사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매향리 농섬 작업 이후에 10년만이다. 이번 작업은 ‘한국전쟁 기념탑’에 대한 기록이다. 결국 또 한국전쟁에 관한 작업인 셈이다. 동두천에서 매향리로 그리고 ‘한국전쟁 기념탑’이다. 아! 이 작업 전에 철원에 있는 민통선 마을의 이장을 꼬드겨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마을의 가족사진과 풍경을 찍은 것이 있다. 뭔가 아쉬운 점이 남아 결국 발표하지는 않았다. 11×14인치 프린트 50장의 포트폴리오로만 남았다. 작업을 한다고 꼭 발표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다. 언제고 보여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아직도 휴전일 뿐인데 곳곳에 승전탑들이 서있다. 전국적으로 보면 숫자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지금 우리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일부를 파악할 수 있다. 나처럼 58년생들은 전후세대로,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간접적으로 배워왔을 뿐이다. 또한 오늘의 세대와는 또 다른 이해도의 차이가 있다.

승전탑 역시 획일적으로 승리한 전쟁이라는 시각 속에서 희화화 되었다. 게다가 어떤 것들은 애들 총싸움하는 수준의 조형물로, 형상화 수준이 떨어지는 것들도 있다. 지난 군사정권들은 이런 조형물들을 마구잡이로 만들었다. 그래서 차츰 시간이 흐르자 부서지거나 사라지고 구석에 방치되고 있다. 물론 정부의 관심도 정책도 없다. 주로 이런 조형물들은 전쟁이 치열했던 서울경기나 강원권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승전탑만 있는 것보다는 조형물이 함께 있는 것을 약 60개 정도 선정해 작업을 했다.

다큐멘터리사진에 대해 : 당신의 작업은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인가?

다큐멘터리사진은 끝났다. 장르로서의 다큐멘터리사진은 1930년대 워커 에반스가 이야기했듯 ‘모순’이자 루이스 하인에게서 끝난 것이다. 그럼 지금의 다큐멘터리사진은 무엇인가? 그건 스타일일 뿐이다. 또한 역사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럼 사진은 예술인가? 그렇다. 예술이 요구하는 모든 것은 이미 사진에 담겨있다. 즉 사진은 예술이다.

나는 전에 매향리의 농섬에서 작업을 한 적이 있다. 35mm 카메라로 촬영했고, 아큐파인(Acufine)과 같은 고에너지 현상액을 이용해 현상했다. 그렇게 하면 중간 톤이 확장된다. 하지만 35mm 판형은 너무 작았다. 그래서 핫셀블러드의 정방형 포맷과 중형 필름 사이즈가 마음에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 프린트가 너무 밝은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이 톤은 문법이자 이데올로기다. 즉 이런 톤으로 관객들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다. 중간의 회색 톤들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좀더 냉정하게 사물을 보길 원했다. 나는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농섬을 찍었던 사진들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찍히고 보여졌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적인 관점은 이분법적이다. 2003년 미국 휘트니미술관에서 제3세계 예술가들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전시한 에 초대된 적이 있다. 우리 상황에서 본 특수성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나의 문법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사진의 예술성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눌러서 진하게 만든 톤들은 감정을 쉽게 동화시킨다. 반면에 회색 톤은 대상을 냉정하게 보게 만든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다. 형태를 파악해야 한다. 대상을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교육에 대해 : 과거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지방을 돌아다니다 보면 아직도 서당이 있다. 한문학원이 아니라 기거도 하면서 공부하는 옛 서당이다. 이건 요즘 교육시스템이 아닌데 싶다. 요즘 아이들은 사진이 예술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들에게 사진의 리얼리즘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전에 다큐멘터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사진의 위상이 다른 예술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요즘의 서당처럼 사진에도 그런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교육시킨다. 왜 사진을 하는지, 사진으로 뭘 하겠다는 것인지를 묻는다. 하지만 원론적인 교육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올바른 일이라 생각한다.

이 아이들은 디지털에 익숙하겠지만 우리는 필름으로 찍는 원론적인 교육을 한다. 서당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곳에서 고도화된 테크닉, 디지털이 넘볼 수 없는 퀄리티 있는 작업을 하도록 교육한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보는 법’이 뛰어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문학과 조형적인 감각 그리고 사회를 보는 자기성숙도가 결합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진작업에 대해 : 당신은 교육자이자 사진가인가?

1993년부터 교직에 있었으니 벌써 17년째다. 당시 학교(백제대 사진과)에 부임할 때만해도 몇 년 후면 서울로 올라올 것이라고 했는데…. 살기 좋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학교도 좋아 게을러졌다. 사실 현장에서 사진만을 직어 어렵게 삶을 영위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하다. 작가로서 안정화는 작품에 대한 열정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사진에 대한 철학은 깊어진 것 같다. 내게 남아 있는 사진가로서의 인생은 아직 길다. 올해 말 한미사진미술관 전시를 마치고 나면, 더욱 개인적인 성찰의 기회를 가져보고 싶다. 오십이 넘으면서 살아온 경로를 되짚어 보건데, 이제는 뜻을 펼칠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한다.


사진계에 대해 :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사진가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잘 하겠지. 그보다는 사진의 유통에 관심이 많다. 여기서 유통이라 함은 사진의 금전적 거래가 아니라 적절한 단체나 기관에 영구 보존을 뜻하는 것이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사진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는 스트레이트 사진이 위축되어 있는 듯하다. 사진은 여러모로 멋지고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유통에서 경로가 막혀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들은 유행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준다. 대안이라면 수요자(갤러리, 뮤지엄, 공공기관 등)를 설득해 많은 사진가의 사진이 수장고에 들어가 역사적인 기록과 정신으로 남고 후대에 전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고 또한 그런 사진가들이 많았으면 한다. 그런 측면에서 몇몇 스타 사진가들이 고가에 몇 작품을 파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 사진은 물질적인 존재인 프린트로 보다 다양하고 솔직하게 영구히 남겨져야 한다.




강용석에 대해 들은 것은 내가 사진을 시작하던 91년 초였던 것 같다. 노동운동을 하려면 현장에 투신해야 하는 것처럼 사진을 찍기 위해 현장(동두천)에 투신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선하고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기껏해야 미군을 위한 기념사진이 우리에게는 외세와 분단의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되는 것에 놀라며, 그것은 강용석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토대가 됐다고 믿었다.

그와의 연배 차이 때문인지 쉽게 다가가기는 힘들지만 내가 이 판에서 알아온 사진가 중 보기 드물게 선비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 그리고 행동이 그러하다. 그래서 그가 사진을 찍은 30년 동안 일관되게 견지해 온 전쟁과 분단의 기록들은 무척이나 소중한 우리 시대의 기록일 것이다. 이번 연말에 있을 그의 새 전시가 기대된다.



강용석은 1958년 출생으로, 1984년 중앙대 사진학과와 1986년 동대학원 사진학과 석사, 1991년 미국 오하이오대학 사진학 석사를 마쳤다. 개인전 '매향리 풍경'(서울 대안공간 풀, 부산 영광갤러리, 1999)과 '동두천과 매향리'(서울 SK 포토갤러리, 2000)에 이어 올해 5월21일부터 6월3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M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 4인의 연속 전시 중 하나로 기획된 '동두천 기념사진'전을 갖는다. 그리고 연말에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개인전 '한국전쟁 기념비'가 예정되어 있다. 2007년 '한국 현대사진 10인전-전통과 진보, 그 딜레마를 묻다'(한미사진미술관), 2006년 '대구사진비엔날레'(대구문화예술회관), 2003년 'The American Effect'(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2002년 '광주비엔날레 Project 1-Pause'(광주비엔날레 전시장), 2000년 '한국 현대미술 중심의 이동전-이동하는 몸, 흔들리는 땅'(서울 문화예술진흥원 미술관) 등 단체전에 참가했다.



* 본 기사는 <월간사진> 2009년 6월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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